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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재정립

마당이 좋은 이유, 이젠 잎이다.

by opera




아침 운동을 한다. 마당은 어제와 조금도 다름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밤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은 홍도화 촉도 조금 더 자란 것 같다. 전주에 심은 서부해당화도 제법 뿌리를 내린 것 같다. 무엇보다도, 나를 기쁘게 해 줬던 박태기나무는 꽃분홍색이 바래지고, 통통했던 밥풀도 늘어져 간다. 이제 곧 다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옆에선 잎이 난다. 윤기를 좌르르 머금은 탄실한 잎이 봉긋봉긋 올라오고 있다. 예쁘다. 언제 왔는지도 모르게 살짝 왔던 봄은 농익어 서글프지만, 발을 비집고 들어오는 초 여름을 향해 자리를 내주기 시작한다. 이제 잎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록! 꽃을 밀어낼 만한 여린 잎의 계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관계"라고 힘주어 말했던 어느 분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그분의 관계는 100% "처세의 관계"였다. 당시에는 중요해 보였다. 결과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관계에 열중했다. 나는 하려고 애도 별로 못썼지만, 해 지지도 않았다. 적당하게 부드럽게 대충 다른 사람들 피곤하지 않게,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유야무야 했던 행정의 결과로 형편이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지나고 나면 잘못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지난 것은 과거로 묻어두는 것이 낫다는 선조의 지혜 덕일까. 파내어 잘잘못을 가려, 앞으로를 위한 퇴비로 쓰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로 치부되고 만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야 하며, 또 있을 때 뭔가를 쥐려고 하는 것이다. 옳지 않다. 자연은 분명히 말한다. 외로울지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고, 되는 건 되는 게 또 사람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 어쩔 수없이, 때론 버려야 할 관계에도 연연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물 흐르듯이 흐르는 자연스러운 관계다. 물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법이 없다. 막히면 돌아간다. 고이지 않으면 썩지 않는다. 바람직한 관계는 순리대로 도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처럼 흐름에 따라 맡기면 된다.


아침에 물을 주고 나면, 나무는 서로 부둥켜안은 뿌리를 통해 제 몸을 부딪쳐 가면서 물을 공유한다. 어떤 나무도 저 혼자 물을 독차지하지 않는다. 화분에 아파트를 마련한 나무를 빼곤. 옆에 어떤 친구가 있든 간에 열심히 주고받고, 공유하는 것이다. 관계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상의 모든 자식이 부모의 간절한 원함만으로 낳은 자식이겠는가. 누가 누구의 부모가 될지, 누가 누구의 자식이 될지도 모르게 세상에 태어났다.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것이 우리의 의지대로 된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서로 보듬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고, 사회의 발걸음 속에서 부대끼고 받으며 자라난다. 그리고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듯이 부모라고 권위를 주장하던 시대도 이미 끝났다. 인정해주는 것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줘야 바른 관계가 형성된다. 나무를 통해서, 풀들을 통해서 마당을 보며 그 과정을 지켜본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가 없었다. 겨울에는 무섭고, 소리조차 살벌한 바람이 분다. 이제 살았다 싶을 때, 시샘 많은 꽃샘추위가 몰고 오는 바람은 칼날같이 맵게 차고 시끄럽다. 나 같으면 벌써 뛰쳐나왔을 혹독한 시련을 마당에서 살고 있는 얘들은 견뎠다. 아니 견딘 것이 아니라 견디어졌다. 왜냐면 시련은 이 아이들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으랴"는 말처럼 마당에서 꽃 키워본 사람은 다 실감할 것이다.


흔들리기 때문에 지지대를 세워 둔다. 바르고 곧게 쭉 올라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대부분 구부러진 나무를 싫어한다. 늘씬하게 잘 자란 보기 좋은 나무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지대를 세운다. 나도 몇 그루 지지대를 세워 주었다. 하지만 이 지지대가 닿는 부분에는 사람으로 치면 부스럼이 생기고 상처가 생긴다. 말을 못 할 뿐이지 나무들은 뼈대를 교정하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사람 눈에 아름다운 나무가 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고통을 겪는다. 시련을 견딘 것이 관계의 두 번 째였다.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고 주어야 한다. 물 조차도 혼자서만 마실 수가 없다. 게다가 일부, 주인이 원하는 대로 수형과 모양을 잡기 위해서 뼈가 뒤틀어지는 고통도 감내해야 되고 때로는 제 살과 뼈 마디가 잘려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는 제 모습을 감상할 수가 없다. 오직 바라보는 자의 눈에 들게 만들어질 뿐이다. 마당은 풀과 원하지 않는 초목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풀도 살아나려 태어났지만 뽑힌다. 마당에선 살아나기도 하지만, 죽어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표 나지 않고 조화롭게 유지되는 것은 희생하는 자연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관계는 자아 희생의 관계다.


나누어 줘야 하고 고통을 감수해야 하며 때로는 제거되어야 하는 살벌한 관계가 물론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 마당에서도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다. 하물며 우리 사는 세상에서 어떻겠는가... 현인들이, 아니 많은 사람들이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내 것 아니면 상관하지 말아라" 초연하게 살아가는 경험론을 자꾸 얘기하는 이유가, 이 마당의 상생과 다른 점이 있을까.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가장 옳고 중요하다는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방도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저 움직일 수 있는 내 마음 근육을 훈련시키고 연단시킬 수밖에 없다. 마당이 좋은 이유는, 자연 속에서 사는 즐거운 이유는 바로 그런 점이다. 잊기 쉬운 아둔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자기의 정체성은 잃지 않고, 결국에는 제 몫을 해내는 작은 나무들, 채소들, 꽃들이 온몸으로 매일매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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