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어제는 사계장미를 샀다. 이웃 지인과 아주 모처럼만에 점심하러 가는 중, 길가에 "향기 나는 영국 장미"라는 팻말을 보곤 돌아오는 길에 들렀다. 지난주 사계장미를 두 그루 사서 심었는데, "영국 장미"라는 말에 현혹된 것이다. 올해는 장미값이 비싸다. 코로나 여파 때문에 나무도 꽃도 조금씩 오른 것 같다. 원예 농가도 힘들 수밖에 없다. 수요 자체가 작년보다 줄었으니, 어서 코로나가 종식되기를 빌어본다. 꽃을 많이 가꿔보지도 않고 꽃꽂이도 별로 해보진 않았지만, 이번에 수선화를 식탁에 꽂고 보니 괜찮아, 지금은 지는 튤립을 몇 송이 꽃아 두고 있다. 앞으로도 마당에서 충분히 산 녀셕들은, 거실 구경을 시켜줄 예정이다. 그래서 꽃 중의 꽃 장미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가시 많은 장미를 심으면서 활짝 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장미(Rose , 학명 Rosa hybrida Hortorum)는 국민 30% 이상이 "준 정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영국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꽃 중의 하나다.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 로마에서도 키우던 역사를 가진 꽃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야생종과 교배하여 다양한 모양의 장미를 만들었다. 바빌로니아 공중정원에서 장미에 물을 주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왕비의 위로가 되었던 꽃이다. 꽃말도 여러 가지지만, 아마도 "5월의 여왕, 아름다움, 열정"이 대표적인 말이 아닐까. 오늘날 240여 종이 넘는 다양한 장미가 있는데, 장미의 분포와 종자 개량에 노력한 사람들도 영국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사실 장미는 영국 왕실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인의 장미 사랑은 1455년에 벌어진 영국의 장미전쟁에서 랭커스터 왕가가 붉은색의 장미를, 요크 왕가에서 흰 장미를 상징으로 삼은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오늘날 영국의 국화는 장미다.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한 에드워드 8세(후에 윈저공)는 유명한 "장미 재배가"이기도 했다. 장미를 사랑한 남자가 사랑을 위해서 왕위까지 포기했다는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장미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가시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면 진딧물이 많이 끼인다. 물론 내가 보는 관점에서다. 아름다움 뒤엔 보이지 않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자세히 관찰해 보니 가시가 정말 크고 뾰족하다. 장미가시에 찔려 죽은 릴케 이야기는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릴케는 평생 장미를 사랑하고 말년에는 장미를 가꾸며 시작(詩作)에 몰두했지만, 장미 가시에 찔려 결국은 죽음에 이른다. 물론 장미가시에 찔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기보다, 그로 인한 패혈증과 또 백혈병으로 인한 죽음이긴 했지만, 시인이었기에 릴케의 죽음이 장미와 더불어 아름답게 미화된 것은 아닌가 생각 든다. 장미를 노래한 릴케의 시는 많지만, 그가 직접 지었다는, 묘비의 시도 아름답다.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 viel Lidem.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너무도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기쁨이여
"호사다마"라는 말이 여기에 어울리진 않겠지만, 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까지 주면 되겠는가 싶다. 차라리 적당히 모자란 듯이 사는 것이 낫다. 조금 모자란듯한 것이, 너무 똑똑하고 완벽한 것보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도, 함께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낫겠다.
보리하고 승리만 봐도 그렇다. 승리는 똑 부러진다. "치와와"라는 아이가 원래 그렇게 똑 부러지긴 하지만, 보리는 어떤가, 요크셔도 날렵하고 제법 사납기도 하다는데 개마다 성격의 차이가 있는지, 보리는 소심하고 연약하고 가냘픈 마음의 소유자다. 그러니 조금만 자기 맘에 안 맞거나 어디가 아파도 표를 금방 낸다. 당연히 주변에서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승리보다 나이도 많은데 항상 가족들 품에 안겨서 만져 줘야 하는 아이는 보리다. 야무진 승리는 애교로 간식을 얻어먹으면, 보리는 그냥 옆에서 곁다리로 먹는다.
조금 부족한 듯해야, 애틋한 마음이 든다. 장미처럼 화려하고 빛나지만 쉽게 범접할 수 없이 가시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꽃도 좋지만, 이제 막 꽃을 피우려고 하는 소박한 야생화 마가렛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 아니다. 모두가 다 이쁘고 다 제 몫을 한다. 마가렛도 장미도. 오늘도.
아무튼 어제 산 장미도 가시가 너무 많아, 걱정이 된다. 옆으로 크지 않고 위로만 큰 것 같아 꽃을 보겠냐 했더니, 윗가지를 치시면서 "가지를 잘라주면 옆으로 잘 자란다. 꽃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니, 믿어 볼 수밖에. 마당 곳곳에 얘기 장미도 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순이 다시 나온다. 한 곳으로 모으고, 우리 강아지들 어릴 때 썼던 펜스가 있어 보호막을 만들어 본다.
영국 사람들은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서 아무리 작은 집에 살아도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어, 꽃과 나무와 조경을 가꾼다. 나도 넷플릭스에서 하는 정원 프로그램을 즐겨 시청했다. "몬티 돈(Monty Don)의 정원 만들기" 프로젝트를 참 재밌게 봤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집 만들어주고, 리모델링하는 프로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이 프로에는 정원을 리모델링해야 하는 사연을 보내면 당첨된 사람에게 그들이 원하는 목적에 부합되는 정원을 꾸며주는 것이다. 상상하지 못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탈바꿈한 것을 봤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망을 가지며 기뻐하는 소박한 사람들을 봤다.
나의 작은 마당도 그렇게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지만 계절적인 특성도 있는지라, 우리 여건에 맞게 꾸미는 것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영국정원이나 유럽 정원이 탐나는 것은 아니지만, 굵은 올리브나무 하나는 있었으면 한다. 하지만 이루어지기 힘든 꿈이다. 화분에 심겨진 올리브나무 2년생 3년생 두 개를 샀는데, 3년생은 먼저 갔다. 화분에 심겨긴 채로 있다. 아마 올리브나무를 보면서 지중해의 푸르름과 그리스 로마 역사를 추억해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장미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보다 5월부터 피기 시작하면 여름 내내 피고 지며, 꽃을 계속 피우는 점이다. 마당을 책임진다. 집 담장엔 줄기 장미로 심었다. 몇 년이 되어 해마다 예쁜 꽃을 피우곤 한다. 가을이면 잘라주어야 대가 굵어진다고 하는데, 원예라곤 모르는 나는 한 번도 잘라주지 않았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는 편이라 더더욱 자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웃집들보단 조금 가늘긴 해도, 거르지 않고 꽃을 피워준다. 사계장미는 꽃송이도 크다고 하는데, 올해는 큰 송이의 장미를 만날 수 있을까. 가시뿐인 녀석이 어떻게 자리를 잡고, 꽃을 피워낼지 염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