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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해걸이"를 한다

인생 해걸이를 생각해 보며..

by opera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장날이라 장에 나가서 여름을 밝혀줄 작은 꽃들을 조금 사서 심어야겠다. 나무에서 피는 꽃도 예쁘지만, 마당 구석구석 예쁘게 피는 꽃들은 역시 이 계절의 주인공들이다. 온실에서 나온 초년생이나, 야생되는 다년생 꽃들은 한여름 내내 피고 지면서 여름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그러니 해마다 조금씩 꽃을 사서 키우는 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당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꽃을 피우는 것들은 첫해보단 좀 작게 핀다. 튤립도 그렇다. 구근류는 가을에 수확해 양파망 같은 곳에 넣어 겨울 지내고, 초 봄에 심으라 하는데, 나는 꽃이 진 튤립 구근을 파내지 않고, 그냥 땅에서 겨울을 나게 둔다. 게을러 그렇게 못하는 것이다. 가을에는 새로 산 구근을 또 심는다. 이듬해 봄에 보면 새로 심은 것과 기존 것은 확연한 차이가 난다. 새로 심은 녀셕이 훨씬 크다. 우리 튤립 정원 깊숙한 곳에는 몇 년에 걸쳐 엉켜져 있는 구근 지하무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영하의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고(지금까지는), 해마다 크든 작든 꽃을 피우고 제 몫을 다해내는 것을 보면 대견스럽다.


아무튼, 다른데 조금 덜 쓰면 될 일이다. 꽃과 나무를 사는 것은 한해의 작은 즐거움 중의 하나다. 이번 장날에도 꽃장수 아주머니는 인기다. "이것 야생되나요?" "저 꽃은 얼마예요" 여기저기서 묻는 소리가 들린다. 시골이라도 나이 드신 분들도 꽃은 산다. 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해를 아름답게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일이다.


꽃시장과 더불어 시장 한쪽으로는 채소 모종이 많이 나와 있다. 여름의 부식거리를 책임질 온갖 종류의 채소들이 몸 바쳐 헌신할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4월 초부터 심기 시작해서 아직도 계속 심는 사람들이 많다. 몇 가지 채소는 이미 심었고, 오늘은 파프리카와 피망을 산다. 제라늄과, 이름도 모르는 야생화를 몇 개 샀다. 지금부터 가을이 올 때까지 마당을 채워 주고 먹거리를 줄 것이다.


장에 다녀와 오후에 물주다 보니, 목단이 하얀 꽃을 한송이 피웠다. 작은 목단은 작년에 꽃을 전혀 피우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는 제 몸이 휘도록 많은 꽃송이들을 달고 있어 기대는 했지만, 아침에도 피지 않았었는데, 낮에 더워서 그랬는지 몽우리가 활짝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4월 말 5월 초에 피는 꽃인데 너무 빨리 나왔다. 작년보다도 일주일 이상 일찍 핀 것 같다. 작년에 꽃을 못 피워 미안한 마음에 올해는 원 없이 피우려고, 먼저 나왔는지도 모른다.


한해를 거르면서, 영양분도 더 비축해서인지 꽃도 희고 화사하다. 튼실하고 풍성하게 자리 잡고 늦은 봄을 밝혀준다. 지난주 일교차가 커서 꽃몽우리가 상할까를 걱정했는데, 어제오늘 급격한 날씨 변화에 벌써 핀 것이다. 희고 여린 꽃송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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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속의 초목들은 "해걸이(alternate year bearing)"를 한다. 도무지 제 자신을 드러낼 형편이 되지 않을 때는 내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해걸이를 하고 난 다음해에는 훨씬 더 소담한 꽃과 열매도 많이 맺는다. 문득 우리 삶에도 해걸이가 있으면 어떨까는 생각이 든다. 서양에서는 안식년도 있다고 하던데...생산을 위한 모든 이기적인 행위를 차단하고, 차단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온전히 자아와 삶의 본분에만 충실하고, 원시적인 시간을 가져본다면 많은 새로움을 충전할 수 있지 않을까. 밀려나서 하는 쉼 말고, 가장 바쁠 때 돌아보고 갈 수 있는 용기의 해걸이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하루, "시간걸이"부터 충실하게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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