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비

해동비 사랑비

by opera

봉사하는 복지관에서 어르신들의 심리 검사를 위한 마음버스가 오늘 온다고 했다. 요즘 봉사하고 있는 어르신을 모시고 방문하기로 예약을 해두었다.

돌 봐 드리는 어르신은 자녀들도 비교적 잘 살고 있고, 구구단도 아실 정도로 기도 있고 식사도 잘하시고 노인 일자리 일도 하시는, 연세는 높지만 비교적 건강하신 분이시다. 다만 어르신께서는 최근의 일보다는 주로 옛날 얘기를 하시고, 자녀들이 어렸을 때 고생하며 뒷바라지했지만 공부를 잘해서 상도 타던 그때가 어르신의 일생에서 제일 좋았다는 등 과거에 젖어 사시는 분이셨다. 늘 옛 얘기를 추억하시면서 "그 시절이 좋았고, 지금은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별 의미가 없어... 빨리 죽기나 해야 하는 데~~" 하시며 한탄하셔서, 우울한 마음이 크다 생각해 마음버스 올 때 상담을 요청한 것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다 되어 어르신을 모시고 함께 들깨 칼국수를 먹었다. 어르신께서는 "칼국수가 참 맛있어~" 하시며 천천히 한 그릇을 다 비우셨다. 시간이 되어 상담하러 갔는데 먼저 문진이 있었다. 보건소에서 나오신 선생님이 문진을 하셨는데 몇 질문을 통해 어르신 상태를 보고는 거의 정상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르신께서 지금 긴장하신 것 같은데 평상시에는 즐거운 일이 별로 없으시고 살아서 뭣하나 는 얘기를 자주 하신다고 알려드렸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르신께서 본인의 이름으로 문진 결과에 서명하실 정도로 총기 있게 답하시니 우울증 검사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한다. 다만 보건소 선생님께서 2~3주 후에 한번 방문해서 다시 보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면서 어르신께서 보건소에 들러 치매 검사를 하시면 좋겠다고 권했다. 어르신을 차로 모시면서 보건소에 가서 치매 검사를 하시면 어떻겠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치매 검사는 안 하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래서 잠깐 앉아계시라고 한 후 인사를 하려고 나갔다 오니 어르신께서 차에서 내려 뒷 나무옆에 쪼그려 앉아 계셨다.

깜짝 놀라 왜 그러시느냐 혹 어디 아프시냐고 여쭈니, "속이 메슥거리고 안 좋아 토할 것 같아 ~"하자마자, 점심때 드신 칼국수를 모조리 다 내보내셨다. 놀라서 등을 두드려 드리니 어르신께서도 놀라셨는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하시면서 계속 토를 하셔서 등을 만져 드렸다. 어르신께서 게워내신 후, "아이고 이걸 어떡하지~" 하시며 걱정하셔서, 걱정 마시라 하고 안정시켜 드린 후 얼른 차 안으로 모셨다.

다행히 차 에는 강아지들 때문에 기저귀도 있고 비닐봉지가 있어 토사물을 기저귀로 싸서 비닐봉지에 담아 쓰레기통에 치워버린 후 나무 주변을 정리했다.

연신 "미안해서 어떡하나~"하시는 어르신께 괜찮다고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어르신 속은 괜찮으신지 여쭈니 속은 시원하다고 하신다. 다만 어르신 칼국수 맛있게 드셨는데 그걸 다 내보내 배고프시지 않겠냐고 여쭈니, 괜찮다고 하셨지만 마음이 쓰였다.

"정말 오랜만에 점심을 많이 맛있게 먹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시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도 문진 받을 때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쓰셨던 건 아니셨나 싶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답변을 많이 하셔서 내심 저건 아닌데 싶기도 했지만, 어르신께서는 처음 받아보는 문진에서 상식적으로 바른 답을 해야 않나 하며 나름 신경을 쓰셨나 보다. 주변 지인이 부모님 치매검사했을 때 평소보다 훨씬 똑똑하게 답하셔서 오히려 민망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한바탕 소동을 끝내고 집으로 출발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조금씩 계속 내리고 있었다. 와이퍼로 빗물을 가르며 운전하다, "어르신 정말 배 안 고프세요? 하며 말을 걸어본다. 창밖을 보고 계시던 어르신께서는 다른 말씀을 하신다.

" 지금 내리는 비가 무슨 비인지 알아?" "지금 오니 봄비겠죠"라고 대답하니, "봄에 오니, 봄 비는 맞지... 그렇지만 지금 비는 또 다른 이름이 있어.

해동비야! 이 비의 이름은 해동비~"

"무슨 비요?" "해동비 "

"추운 겨울에 얼었던 온갖 것들을 녹여주고 깊이깊이 스며들어 땅속 깊이 움츠리고 있었던 것까지 녹여 봄 맞을 준비를 하게 하는 해동비야...

그래서 많이 많이 내려야 해...

온 땅 구석구석 빠짐없이 스며들도록 ~~"

아! 이 비가 해동비구나!

한겨울 내내 꽁꽁 얼었던 만물을 속까지 녹여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스며들도록 해 준다는 해동비 ~~ 어르신 말씀을 들으며 내 마음속으로도 스며드는 해동비를 느끼는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맑아지며 환해짐을 경험한다.

어르신께서는 칼국수 한 그릇을 그대로 게워버려 민망해하셨지만, 소소로이 대접한 칼국수 한 그릇보다 몇 배 더 몇 배 값있고 소중한 해동비를 선물로 주셨다.

어르신께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면 좋겠다는 소망도, 내리는 해동비 속에 흘려보내본다.

점점 초췌해지고 굵은 주름으로 덮여가는 얼굴, 힘들고 지쳐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고 않는 육신에 사실 무슨 약이 있을까? 그러니 젊은 시절 힘든 상황에서도 억척스럽게 뒷바라지했던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던 그때로 회귀해 힘을 얻고 싶으셨는지도 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오버해 혹시라도 우울증이 아닐까 싶어, 지레 검사라도 받아보시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어르신께서는 오히려 당신의 지금 상태가 건강하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준 것인지도 모른다.

창밖을 보면서 상념에 젖은 어르신께 "해동비 내리는 날, 어르신과 맛있게 식사하면서 드라이브하고 온 것으로 생각하세요"라고 말씀드리니, 어르신께서는 "미안하고 고마워~"라고 하시면서 살짝 웃으신다.


어르신을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오니, 종일 내려오는 해동비에 촉촉이 젖은 마당의 온갖 생명들이 저마다의 기개를 한껏 뽐내며 나를 반기고 있다.

하얗게 노랗게 꽃 피운 왕수선화, 보라색 노란색의 크로커스, 몽글몽글 보랏빛 꽃 피울 히야신스, 여기저기서 삐죽거리며 경쟁하듯 올라오는 온갖 색깔의 튤립구근들, 겨우내 견디며 지켜온 봉우리를 벌리려는 홍목련, 가지마다 아기솜털 보송한 하얀 목련 봉오리, 막 물오르기 시작하는 정원의 나무들이 가상하다.

온몸 발갛게 하늘을 향해 달아오른 플라밍고 셀렉스, 뾰족한 눈꽃을 밀고 나오려는 박태기나무, 죽은 듯 아직은 미동도 않는 배롱나무, 가지마다 홍조띠며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청단풍 홍단풍 나무, 눈뜰 날만 기다리고 있는 팥꽃나무 여린 가지, 담장으로 담벼락으로 가고픈 꿈으로까지 양껏 뻗어가고 있는 덩굴장미까지...

해동비가 안겨준 자유에 온몸을 맡긴 정원의 아이들은 어둡고 아프고 무섭기까지 했을지 모를 지난겨울을 흘려보내며 찾아온 봄의 사랑에 흠뻑 젖어 충만해 가고 있다.

이제야 어제보다 오늘 아침 산딸나무 봉오리가 조금 더 벌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밤새 내린 해동비가 뿌리 깊숙이까지 스며들어 단단하게 가두었던 육신을 따뜻이 녹여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품도록 했음을…

겨우내 아끼며 곱게 품어왔던 사랑의 노래를 봄의 입을 통해,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들려주고 혹여라도 아팠을지 모를 지난 계절까지 보듬기 위해 이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해동비, 사랑비가 말해주고 있었다.


한껏 물오른 플라밍고 셀릭스

고개 숙인 왕수선화꽃 / 개화를 준비하는 히야신스

노란 카라 촉 / 모진 겨울 견디고 봄아래 막 펼치려는 산딸나무 잎(마치 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잎이다)

수선화들과 부지런히 올라오는 튤립 아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