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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현기 Nov 24. 2020

백지 앞에 앉았다

   밤새 잠을 설쳐야 했다. 어젯밤엔 위층 어느 집에선가 부부싸움이 있었다. 여인의 울음 섞인 악다구니와 술 취한 듯 굵직한 남정네의 고함소리. 여자 아이의 울음에 뒤벅범된 몇몇의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새벽 두 시가 넘어서야 그 싸움은 멎었다. 코로나에 지친 인간들이 가정에서 폭발해 버리고 있다. 잔뜩 찌푸린 아침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오늘은 뭐라도 쏟아져 내일듯한 날이다. 답답한 마음을 짧게라도 곧잘 써대었다. 어느 순간 그 일을 멈추었다. 왜 글쓰기를 그만둔 걸까? 생각의 정리와 깊이 있는 사색을 준다고 예찬하던 글쓰기가 아니었던가.


  아마도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먹고사는 생계를 책임지고 있잖은가. 직장생활에서의 각종 모임에 회식이다 뭐 다해서 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싫다고 회피하거나 거부하기도 쉽지 않다.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한의 희생을 요구받는다. 인간관계가 좋아야 삶의 질도 좋아지고 가족의 평화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속내는 스스로도 그 일들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의 이유는 욕심 때문이다.
몇 해 전부터 독서에 재미가 붙었다. 짬이 있을 때마다 독서로 그 시간을 채운다. 좋은 글을 많이도 읽었다. 명품 문장을 만나면 필사도 한다. 그래서일까. 좋은 글을 알아보는 안목은 어느 누구에 뒤지지 않을 만큼 수준이 높다. 하지만 정작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읽는 눈은 최고인데 내 글은 형편없는 졸작이라 감히 글을 쓸 용기를 내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수줍음 때문이다. 중학교를 갖 마친 여학생의 순수함처럼 부끄러움이 많아서다. 철이 없다고 해야 하나 순수하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현실의 문제는 뒷전이고 오직 현재의 삶이 즐겁고 신나는 청소년의 마음이다. 싫으면 죽어도 하지 않는다. 수줍음은 고집이기도 하다.


  아내와의 만남은 13번째 중매 자리에서였다. 키는 멀 때같이 훤칠하고 순수함이 얼굴 여기저기에서 꿀물처럼 뚝뚝 떨어다. 한마디로 나의 이상형을 만난 것이다. 고난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와서는 스스럼없이 옷을 벗 갈아입는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나는 투명인간인가?
 수줍음 많든 그 새댁은 이제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아줌마가 되었다.


  이렇듯 삶에 찌들고 욕심과 수줍음 더해 글쓰기는 남의 일처럼 멀어져 버린 부러움이 된 것이다.
 나이에 어디 잘 보일 곳도 없고, 그렇다고 부러울 것도 없는 중년의 아저씨가 이닌가.  넉넉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안정, 자식도 잘 자라 주어서 남부러울 것도 없다. 주 인간관계도 순탄하게 엮여 있어서 딱히 부족함이 없.  그렇다면 부끄러울 것 없이 내 속 마음 훌러덩 벗어 보여도 되지 않을까.  남들이 관심도 갖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갇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아내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처럼 나도 그래야다. 겁 없이 볼펜을 들고 노트의 칸을 메워나가야다.  마구 두드리는 노트북의 키보드가 고장 나면 어떠랴.  그 정도 살 여유는 있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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