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난 사람
비가 오는 날이면 팥죽이 생각난다. 어제는 춥지도 덥지도 그리고 굵지도 가늘지도 않는 봄비가 내렸다. 소녀박과 쇼핑을 마치고 차를 한 잔하고 헤어지자는 말에 성큼 팥죽을 제안했다. 이른 저녁이지만 대추차보다 좀더 걸죽한 팥죽차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니 말이다.
누군가 말끝에 맛있는 팥죽집이 있다고 하면 곧바로 함께 만나 먹으러 갈 약속부터 잡는다. 또 새로운 팥죽집이 생기면 혼자라도 찾아가서 맛을 본다. 그러니 비오는 날 말동무까지 있으니 잘 됐다 싶어 팥죽을 먹기로 했다. 팥죽집은 단짝처럼 따라오는 생김치와 가느다란 콩나물 무침이 있다면 금상첨화이다.
집근처에 팥죽집이 있기는 하였으나 영 성이차지 않던 참이였는데 작년 여름부터 새로 팥죽집이 생겼는데 여간 맛있는 집이 아니다. 팥죽의 핵심은 쫄깃한 면발과 주루룩 흘러내리는 국물의 농도이다. 팥죽의 간이야 제각각 알아서 맞추면 되지만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충족되어야 한다.
맛있는 팥죽집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면 면발의 굵기도 그렇지만 대체로 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찾지 않게 되는데 새로 생긴 팥죽집은 사장님이 간도 알아서 적당하게 맞추어주고 쫄깃하고 가는 굵기에 국물이 주르륵 흘러내려 환상적이다. 팥죽 특유의 아린맛을 잡아낸 걸쭉한 농도는 매번 팥죽그릇의 바닥을 보게 한다.
소녀박 그녀는 크게 아픈 이후로 음식 섭취에 대해 예민하고 입이 짧다. 나이들어 건강을 신경쓰는 것도 있고 재발병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매사 음식의 맛을 즐기지 못 한다. 그래서 처음 팥죽집을 들어설 때 한 그릇을 비울 수 없으니 반반 나누어서 먹자고 그녀는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남기면 집에 가져 가라고 하면서 두 그릇을 시키자고 했다.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동지죽을 먹고 싶다는 그녀와 팥칼국수를 먹고 싶은 나의 취향 차이도 있고 두 사람이 가서 한 그릇을 시킬 정도의 염치 없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팥죽이라는 것이 여간 수고로운 일이 아니라서 손님에게 나오기까지의 수고에 비해 팥죽값이 박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팥죽을 식당에서 시켜먹지 못 하고 그릇을 가져가 집에 와서 먹다 보면 퉁퉁 부른 면발과 텁텁해 버린 농도가 아쉬움이 남았다. 그런데 식사 시간을 비켜가서 잡은 황금 시간에 염치 없는 짓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오는 날 식사 시간 없이 복잡한 팥죽집이 도착한 시간에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이 동네 사람은 비 오는 날에 팥죽을 더 사먹지 않는다고 하셨다. 다른 곳에서 오래 팥죽집을 하셨다는 사장님은 주거지가 있는 우리 동네로 이사와서 팥죽을 다시 오픈하셨다고 했다. 배달도 안 하고 기존 팥죽집의 서운한 맛을 아는 팥죽매니아들이 분명 다른 동네 팥죽집을 전전하고 있을 거라 짐작만 하였다.
팥죽집 사장님은 내일 생일을 맞는 딸을 위해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다가 부치개를 했다면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고 내밀었다. 따뜻한 부치개 맛에 밀가루 음식을 가리는 소녀박도 맛있게 먹었다. 팥죽집의 첫인상은 소녀박에게 호감인 듯했다.
팥죽집 사장님이 동지죽을 내밀며 쌀동지는 맛이 덜해 밀가루를 살짝 섞었다는 말에 소녀박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동의했다. 팥죽집 반찬은 물김치와 콩나물 무침 그리고 삼삼한 배추김치가 함께 나왔다. 예전에 반찬집도 했다는 사장님은 팥죽만큼이나 반찬도 맛이 좋다. 소녀박 그녀는 먹고 남은 동지 팥죽을 챙기면서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그럼 됐다.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동네에 맛있는 팥죽집이 생겼으니 함께 먹자고 해야 겠다.
나처럼 팥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 오는 날 입 안에 따뜻하게 감겨오는 팥죽의 풍미를 찾고 빗줄기같은 면발을 입 안으로 들이키며 그리운 어느 때를 회상하나 보다. 좀더 시간이 흘러 맛있는 팥죽집이 동네에 생겼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문 밖에 서서 기다릴 날이 멀지 않다. 그러니 두 그릇은 당연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리운 사람과 시간을 떠올리다가 한 가지 해야 할 일 중에 꼭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분명 나는 팥죽을 찾을 것이다. 그러다 팥죽 사장님이 문을 닫게 되는 날이 오면 어쩌지 걱정을 했다. 또 다른 맛있는 팥죽집을 찾겠지만 그 전에 날 잡아 팥죽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졸라볼까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비 오는 날 내 생애 마지막 시간에 떠올릴 것만 같은 팥죽을 또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