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만난 나무
가던 날이 장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공과금을 내야 할 것 같아서 웃장이 있는 축협에 들렀다. 공과금을 내려고 차례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열 명도 넘게 창구를 방패처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아 장날이구나.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5일과 10일에 웃장이 열리고 2일과 7일에 아랫장이 열린다.
도시와 시골이 인접해 있고 가까운 바다와 산이 둘러쌓인 소도시에 정기적으로 장이 열린다는 것은 여간 기쁜일이 아니다. 딱히, 무얼 사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장구경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랑 공과금을 내고 집으로 향하려던 나의 계획은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많은 인파 속에서 은행일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먼저, 송금이랑 계좌이체를 하고 다음으로 공과금 내는 곳으로 갔더니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할 수 없이 포도랑, 복숭아랑, 천도복숭아를 한쪽 소파 옆에 두고 서 있는 사람들 뒤에 따라서 차례를 기다렸다.
30분이 지났을까 한참을 기다리고 나니 어느새 내 앞에 두 사람 정도만 남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원칙이 중요하신 분들은 꼭 있다. 할머니 한 분이 계속 짜증을 내면서 번호표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공과금처리에 불만을 대상없이 중얼거리시더니 공과금 내는 것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셨다.
내 차례도 얼마남지 않고 여러 사람의 민원도 해결할 겸 살짝 다가가서 제 것과 함께 해 드리겠다고 하자 잠깐 놀라시더니 눈을 깜박거리며 반가워 하셨다. 그까이것 원칙이야 뒤집기는 한 순간이다.
그런데 돌발상황이 생기고 말았다. 난데없이 나이드신 아주머니가 다짜고짜 번호표를 들이대면서 내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러자 내 뒷줄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항의가 쏟아지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양보랄 것도 없이 내 앞에 줄을 서는 아주머니는 창구직원들을 향해 '한 사람이 혼자 다하니까 이런 난리가 아니냐'며 은행직원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었다.
세상에 용감한 사람은 참 많다. 사람들의 눈총을 다른 곳으로 저렇게 빨리 옮기는 뻔뻔함이 대범하게 보였다. 그런데 순간 아주머니 눈에 아주 만만하게 보인 내 자신을 살펴보았다. 눈빛, 옷차림, 무엇이 문제였는지 말이다. 사실 내 잘못은 아니다. 아주머니 문제인데 말이다. 그냥 나는 걸려들고 말았다.
하지만 창구 뒤쪽에서 결재만 하던 관리직에 있는 듯한 은행 직원은 자동이체를 하지 않고 창구에서 줄을 서는 우리들을 향해 아무런 대구도 없었다. 거들지도 변명하지도 않으며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장날 창구가 밀리는 것은 다반사라 그러려니 하는 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공과금을 처리하고 은행문을 나서니 장날이라 노점에 놓인 갖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래저래 늦었는데 싶어 야채며, 과일, 생선, 해산물에서 풀냄새, 산냄새, 바다냄새 맡으며 오늘이 장날이라 볼 거리가 많아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로 가는 노점에서 오이를 사고 몇 걸음 나서자 주차장에 꽃과 나무들이 있었다.
장구경에서 내가 빠지지 않고 보는 것이 꽃과 나무구경이다. 식물에 이름을 기억하고 마주하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일만큼이나 반갑고 신나는 일이다. 한해살이 꽃들과 함께 다양한 분재들도 팔고 있었다.
소사분재, 단풍분재, 소나무 분재, 은행분재를 보다가 소나무분재에 눈이 멈추었다. 줄기가 짧고 뭉퉁하게 잘리어진 자리에 몇 가닥 작은 줄기를 드러낸 소나무는 애처롭게 느껴졌다.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다는 것을 몇 번이고 체험하고 낙담하지만 산 속에 살며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나갈 자유를 빼앗기고 손발이 잘린 소나무만큼은 아니라는 생각에 내 삶에 위안이자 소나무에 대한 연민이 솟구쳤다.
아직은 소나무와 단풍을 친구로 맞이할 만큼 삶도 시간도 여유롭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마당 한 켠에 나무를 싶고 매일 말을 걸며 식물들과 다정한 인연을 만들어가는 순간을 꿈꿔보는 장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