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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드네 Aug 22. 2021

신이 있다면

찜찜한 미래2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거부감 없이 친근하고 다가서고 거리를 좁히는 나의 관계능력은 거의 대부분 통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친밀감을 형성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을 수 있게하는 지점! 딱 거기까지가 나의 재주이다. 친근해진 사람이 가까워진 나와의 거리를 나의 동의없이 다가서거나 직진해 오는 순간 그때부터 관계는 제동이 걸린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동이 그나마 덜 걸리기 위해서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상대를 부르는 호명이다. 관계를 통해서 거리를 조정하길 원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가끔 내 호칭의 메시지를 알아듣지 못 하고 나처럼 스스로 관계를 호칭을 통해 규정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이유 때문에 관계가 지속되지 않고 단절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 중에서 하나가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일방적으로  '선생님'이라고 먼저 호칭을 부른다. 열 사람 중 한두 명이 자신은 선생님이 아니라며 '선생님'이라는 규정과 호칭에 거부감을 보이지만 대체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사회적으로 존중의 의미를 내포하기에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인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의 부연 설명을 통해 관계 속에 함께 성장하고 배우고 싶어서  쓰겠다고 하면 대체로 '선생님' 호명에 동의를 한다. 또한, 나와 엇비슷한 '중년'에 이른 사람들에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애매할 때가 있다. '아줌마', '아저씨'라고 부르며 관계에 빨간불을 켜고 시작할 수도 없고 친해지기 전부터 직급을 찾아서 부를 수도 없다. 나는 그와 조직 안에서 엮인 것도 아니고 친인척도 아니니 언니나 오빠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러니 궁여지책으로 찾은 호칭 중에 하나가 '선생님'이기도 하다. 개중에는 나보다 연배가 한참 아래여서 선생님 소리에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으면 '샘'이라는 호칭을 통해 순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나이를 떠나서 '선생님'이란 호칭이 친숙한 관계로 익숙해 지면'샘'이라는 호칭을 통해 관계의 거리를 한발짝 가까이 다가서기도 한다. 

그것이 나의 관계맺기 방식이다. 서로 존중받을 수 있는 거리에서 관계를 맺자는 선포이자 관계설정 방식이다. 실제로 선생님이라는 역할을 오랜 시간 해 왔던터라. 나에게는 익숙한 호칭으로 불리워지길 바래서 먼저 상대방에게 부르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불러주세요.'인 것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신기 있는 사람에게서 내가 원했던 것은 나의 미래였다. 신이 들리지 않은 내가 내 미래를 볼 수는 없지만 대략 예측할 수는 있다. 지금껏 쉰 해가 넘도록 소소하고 잔잔한 나의 삶이었다. 과거의 삶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나의 미래도 그닥'스펙터클'하지 않을 거라는 짐작은 할 수 있다. 

그런 나의 소소하고 밋밋한 나의 삶이 '사주팔자' 중에서 일주와 시주가 바뀌면서 '스펙터클'해 질 수 있다니 여간 설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피클의 일주론'을 펼치며 '임진' 일주를 세 번이나 정독을 했다. 그런데 일주라는 것이 기존 나의 일주와 그렇게 획기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약간의 실망을 하며 책을 덮으려는 순간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첫대면에서 관찰했던 보편적이지 않은 시선과 몸짓의 시각적인 불편함을 해소할 수 있는 목소리였다. 그냥 일반적이고 평범한 음성이 주는 집중력과 진솔함이 약간의 긍정성을 획득하며 일주와 시주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는 주장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만날 장소와 시간을 확인했다. 

드디어 설렘과 기대를 갖고 대화를 시작했다.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상대의 주장에 대한 논리를 살피기 위해 일상에서부터 조금 씩 지나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야기 소재를 확대하며 대화가 이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장소를 이동하며 약간은 취기가 오른 신이들린 사람의 말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대화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취기가 올라야 신이 제대로 내린다는 말에 일단은 믿기로 했다. 신이 내린 경험을 하진 않은 내가 그 말에 대해 검증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다. 메모지를 달라해서 끄적끄적 하고싶은 말은 몇 글자 쓴 다음 말을 했다. 그런데 사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문의 표현들이었다. 친구들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하면 피로도가 급속하게 상승하는 나의 소통방식(성깔)도 잠재웠다.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국어교육이라는 분야에 오래 붙들여 있는 나였기에 맥락을 구성해서 거듭 물어보면 뜻풀이를 내가 했다. 그리고 다시 보충설명까지 해 가면서 발화자의 의도를 다시 맞추었다. 참 답답할 노릇이었지만 그냥 퀴즈풀이 정도로 받아들였다. 그것도 언어적 유희이자 재미난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빠'였다. 말끝마다 '오빠' 소리를 하며 내 신경을 거슬렸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울엄마가 모르는 오빠가 생겼다."고 저항하였으나 그냥 신이 있다는 상황 맥락을 위해 불편한 호칭도 받아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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