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드네 Feb 28. 2022

죽음에 대한 나의 자세

100일 글쓰기 카페: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

언제부터인가 가까운 지인의 결혼식에 가는 일보다 지인의 부모님 장례식에 가는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제 부모님의 장례식이 아닌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에 가는 나이가 되어 갑니다. 점차 죽음이 한걸음 씩 다가옴을 예감하며 나의 죽음에 대한 자세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태어났으니 하루하루 나이들어 가다보면 죽음은 인생의 종착지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떠오를 때 가장 큰 고민은 어디에 내 죽음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 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참 어리석은 고민입니다. 어떻게 죽을 지에 대한 생각보다 어디에 묻힐 것인가를 걱정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나의 죽음에  대한 고민을 하다보니 나름의 답을 찾았고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에 관한 모임을 참여하면서 역사적 기록이 있는 순간부터 인류는 죽음에 관한 고민을 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 모임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은 '사람은 사는대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선한 삶은 분명 선한 죽음을 맞을 것이고 악한 삶은 악한 죽음을 맞을 것이다는 결론에 마음이 참 편해졌습니다. 그 말에 몇 번이고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선한 삶과 영혼을 다듬어 가는 공공선의 실천이야 말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가 아닐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연습도 미리미리 해  두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다반사처럼 여기는 것도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죽음과 관련한 경험 중에서 제가 기억하고 실천하고 싶은 죽음과 장례식장이 있습니다. 완도에 있는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여 눈발을 헤치고 찾아갔더니 지인이 웃으면서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지인의 슬픔에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걱정하고 있던 저는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지인은 아버지께서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식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웃으며 반갑게 맞이하라고 했답니다. 암으로 1년 6개월 정도 투병하시면서 자신의 삶을 어느 정도 정리하였고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유언도 다 하였으니 여한이 없다고 하셨답니다. 본인은 기쁘게 하느님 품으로 가니 나를 위해 시간을 들여 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죽음과 관련한 저의 할머니와의 일화입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3개월 전부터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걷는 것을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천성적으로 부지런하셔서 제가 할머니를 뵈러 집에  갔을 때도 집과 멀리 떨어진 밭에서 김을 메고 계셨습니다.  

해질무렵에 집에 가서 다시 할머니를 찾으러 밭에 갔니 달이 떠오른 밤이 되었습니다. 가을 달밤에 할머니를 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할머니는 저에게 "너는 손녀로서 네 할 도리를 다 했으니 내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다리가 아픈 자신을 위해 집으로 업고 돌아오는 손녀가 고마워서 그러시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웃으면서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저는 슬픔보다는 할머니의 장례식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제가 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찾아서 했습니다. 슬픔보다 할머니를 대신해서 손님을 맞이한다 생각했고 할머니는 본인의 길을 떠났다는 편안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제 죽음과 관련해서 자식들에게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제 죽음이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간소한 장례식을 치루더라도 반갑게 맞이하고 후하게 대접하라고 일러두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게도 지금까지 딸로서 아들로서 크고 작은 기쁨을 충분히 해 주었으니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이들면 어찌될 지 장담할 수 없지만 온전한 정신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책을 읽고 호기심을 잃지 않은 채 늙어가고 싶습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나의 자세입니다. 서른일곱 살에 운명을 달리하신 친정아버지에 비하면 오십을 넘긴 저는 참 많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도 죽음도 다반사라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100일 글쓰기 카페: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