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가 끝난 시정에서
입시는 개미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미끄러지면 한없이 빨려 들어가 버리는 무덤과 같았다. 특히 대학 입시는 더 무서웠다. 누구는 어디를 갔고 누구는 어디를 못 갔다는 낙인이 찍혀 한없이 눈치를 보게 만들었다. 우리에게 입시는 자기 결정권을 모두 앗아가는 고문과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의 충격은 대단했고 나는 누구보다 우울했다. 그토록 바라던 성공과 거리가 먼 사람이 되었다는 충격밖에 없었다.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결정된다는 이 잔인함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있을까 싶다. 여전히 친구들은 자신이 인서울을 했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입시가 끝나고 만화를 그려보려고 구상을 한 적이 있다. 운동권이었던 음악선생님을 필두로 밴드부를 만들어서 야자 시간에 기습 공연을 하는 내용이었다. 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길 기대하며 준비했었다. 만화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항상 입시제도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했다. 입시를 준비하며 나는 불만과 불안이 차오르기만 했다.
한국에서 젊은 사람들의 자살률이 매우 높다는 기사를 보고는 한다. 학창 시절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어렸을 때 충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총량은 적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떠안아야 하는 게 많을수록 그것을 소화시키기는 더 어렵다. 어린 나이에 부담은 죽음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영재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는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시야를 넓히고 자기 결정권을 자신이 가져가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대부분 세상을 자유롭게 보내지 못했던 이유를 반추하면서 적어 봤다.
입시가 끝나고 얼마 뒤에 두 명의 친구와 함께 불쑥 무전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에게 얘기도 안 하고 무작정 나섰다. 무조건 제주도까지 가보겠다고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 친구 둘은 내키지 않아 했다. 나는 일방적으로 설득을 하고 끝내 수긍을 한 친구들과 함께 호기롭게 출발을 했다. 첫날은 얼마 가지도 못하고 길가에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잠을 청했다. 그러면서 가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두 친구는 최대한 빨리 가기를 바랐다. 나는 좀 아쉬웠지만 혼자서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그들을 따랐다. 대부분 히치하이킹을 해서 이동했다. 얻어 탄 차의 주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 사연들마저도 무언가 나에게 작은 울림을 주기도 했다. 동네 양로원에서 자기도 하고 교회에서 잠을 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구까지 와서 한 친구의 친척집에 머물게 됐다. 거기서 친척분의 훈계를 들으며 삼겹살을 먹었다. 며칠 만에 고기인지 삼겹살은 꿀떡 넘어갔다. 대구에 친척집이 있던 친구는 더 이상 가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며 같이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머지 친구와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는 또 그 친구의 친척이 살았다. 그분들은 우리를 정말 잘 거두어 주셨다. 거기서 친척분의 소개로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며칠을 지냈다. 출발하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늦은 밤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매우 취해있는 듯 보였고 나에게 심한 욕을 했다. 가뜩이나 입시를 망친 나는 너무 서글퍼서 미친 듯이 울었다. 그리고 무작정 시내를 걸었다. 죽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기찻길로 가서 거닐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기찻길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바로 기차가 지나갔다. 소름이 끼쳤지만 무언가 마냥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이 있다면 나에게 살아갈 기회를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쨌든 도파민이 마구 분비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날 나는 이전에 나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몸과 마음이 가벼웠고 홀가분했다. 우울함은 씻은 듯 날아간 것 같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친구와 함께 부산 시내를 부지런히 쏘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병의 전조증상이었던 것 같다. 하루 아침에 기분이 확 달라졌다. 바뀐 정도도 굉장히 심했다. 그때에 내가 삶에 대한 부담을 조금 더 내려놓았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소심하고 여린 나에게 정신병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내 답답한 모습을 벗겨내고 싶었다. 그 바람대로 정신 이상이라는 형태로 실현이 되었던 건지 모르겠다
어머니에게 물어서 며칠 뒤 부산에 있다는 수녀 이모를 만났다. 아주 오랜만에 만나게 된 그녀는 내 기억 속 모습과는 좀 달랐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고 조금 더 수척해 보였다. 세월의 흔적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그래도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아주 보기 좋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녀는 우리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다. 내 마음도 조금은 평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들뜬 기분이 가라앉고 평소 내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기도 때문인지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나머지 친구도 더 이상 같이 갈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목적지까지 갈 수는 없었지만 절반 이상은 성공한 여정이었다.
무전여행을 하며 많은 생각을 했다. 중간중간 책도 읽으며 내가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을 했다. 그때 읽은 책은 황석영의 개밥바라기별이었다. 방황하는 나의 청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