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의 말로
입시 준비를 하면서 답답한 마음에 매일 집 근처 학교에서 달리기를 했다. 여느 때와 같이 뛰고 있는데 초록빛 섬광이 번쩍였다. 그 빛은 꽤 넓고 오래 퍼졌다. 나는 순간 얼음이 되어 그 빛을 응시할 뿐이었다. UFO일까, 운석일까, 별똥별일까, 하늘의 계시가 이날까, 갖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 빛의 출처는 지금까지도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가끔 그 빛을 떠올릴 때가 있다. 알 수 없는 그 빛처럼 나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초록빛은 나에게 들어와 병을 만들어버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알 수 없는 빛과 같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생긴 정신병을 가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해 분명히 노력하고 있다. 인생은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닥친 불행을 수습하는 게 인생의 전부라는 생각도 든다. 인생의 의미가 어떻든 나에게 집중하고 오늘만 바라보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그때의 초록빛은 어쩌면 내 인생의 파란불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계속 원하는 대로 나아가 보라는 신호였을 수 있다. 어설프고 못 미덥더라도 나는 분명 나아갔다. 지금도 그렇게 부단히 좋아지는 나를 보게 된다.
성적은 적당한 편이고 미술도 적당히 하는 것 같았다. 다만 여전히 채색이 서툴렀다. 물을 너무 많이 쓴다고 하는데 물감이 아까운 건지 물을 터는 감이 부족한 건지 언제나 그림은 흐리고 흥건하기만 했다. 나의 기분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우울하고 무기력해서 축 쳐져 버린 내 모습과 같았다. 여전히 게임을 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 그때의 나는 시간이 얼른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입시를 준비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매일 보는 문제집과 틀에 박힌 그림 그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게임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는 좋게 나올 것이라는 안이한 기대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지만 꿈은 원대해진 이 상황을 막을 수만 있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 어려운 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게 마음에 안 들고 불만이 가득한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표류했다. 청춘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산불과 같았다. 한없이 번져가며 사고를 확장하고 끄면 또 다른 데로 번져가며 사고를 확장했다. 게임도 재미가 없어질 무렵 정치와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니체와 마르크스를 좋아했다. 그들의 저서를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읽어 댔다. 그래도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기에는 충분했다. 온당한 대우와 의식을 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를 정치는 세상을 어떻게 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답해 주었다. 경쟁주의의 상징인 인서울을 목표로 하면서도 사람은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고를 지향하는 모순을 안고 나의 청춘은 갈피를 못 잡았다.
이것저것 이쪽저쪽 들쑤시며 한 가지에 집중을 못 했다. 그러다가 우석훈의 88만 원 세대를 읽게 됐다. 어차피 아주 열심히 살아도 한국에서 사는 우리는 이미 망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당부의 내용이었다. 적잖이 충격을 먹었다. 게다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핑계를 만들기 딱 좋았다. 세상의 대한 순응이냐, 세상의 대한 반항이냐로 늘 저울질하길 반복했다. 입시를 망쳤고 두 번째 실패를 처절하게 맛봐야 했다. 생각보다 그 좌절감은 굉장했다고 기억한다. 나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릴정도로 무기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