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을지라도

삼수를 하고 있을 때

by 오광락

아버지는 대뜸 재수학원을 보내 줄 테니 삼수를 하라고 했다. 이왕 재수를 한 거 한번 더 해보자는 이유였다. 나와 아버지는 적어도 인서울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부모들이 다 마찬가지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조금 더 괜찮은 상황에서 인생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서울을 해야 적어도 살아가는데 조금 더 나은 판을 짜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밖에 없었다. 딱히 다른 선택지도 없어 보였고 삼수를 해서 잘 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을 느꼈다. 다시 오는 한 해를 기필코 잘해보자 다짐했다.


성공을 위한 기회는 아직 한 발 남았다는 생각이었지만 역시나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재수 학원에서 원생들과 노는데 바빴다. 학원에 잘 나가지도 않고 당구를 치러 가거나 PC방에 가거나 술을 마시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러면서도 무기력과 우울함은 떠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어차피 망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충돌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사회 과목을 가르치던 강사가 눈에 띄었다. 그의 강의는 많은 귀감이 되었다. 역사적 진실과 해프닝, 사회 문제와 요점 등을 재밌고 조리 있게 전달해 주었다. 그는 세상의 혜안을 가지고 있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그와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인생이 너무 보잘것없다며 하소연을 했다. 의욕도 잘 안 나고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북파공작원이었다는 걸 말하면서 자신도 여전히 국가에 감시를 받고 있는 처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많은 정치인들을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더 믿음이 갔다.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며 그는 내 눈망울이 아주 깊고 진하다고 말했다. 혼란스러운 나의 머리를 비우기 위해 그가 일단 자신과 운동을 해보자며 함께 빙판장을 갔다. 빙판에 미끄러지며 스케이트를 타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원한 빙판장에서 신나는 기분이 풍기면서 나는 강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이후 그와 스케이트를 자주 탔다. 나는 잘 살 수 있는 놈이었다는 확신이 뿌리내렸다.


갑자기 인생이 달라져 있었다. 누구든 쉽게 친해졌으며 문제집을 빠르고 정확하게 풀었고 운동신경도 훨씬 좋아졌다. 못 하던 축구도 나름 잘하게 되었고 노래도 더 잘 부를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운동을 하고 수업을 충실히 들었다.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짓도 했다. 평소 다니지도 않던 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날도 많았고 밤을 새우며 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행동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든지 아주 열심히 했다. 자신감은 나날이 올라 축 처진 어깨는 날개를 단 듯 확 피게 되었다. 어디든 날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날개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 믿었다. 새엄마는 TV를 보는 내가 유독 많이 웃어댄다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무슨 소리냐며 그녀를 나무랄 뿐이었다. 나도 병원에 가길 원치 않았다. 단지 기분전환이 된 것으로 여길 뿐이었다.


사회 과목 강사가 말한 대로 내가 아주 잘 될 것이라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새로 들어온 원생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잘 되어 간다고 느꼈다. 나는 비 오는 날 대뜸 그녀의 집 앞에 가서 밤새도록 사랑에 관련된 노래를 불러댔다. 당연하게도 다음 날 그녀는 나를 피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의 날개는 꺾이고 말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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