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의 안정을 되찾은 시기
인서울 대학과는 거리가 먼 지방대라는 타이틀이 아주 잘 어울릴만한 학교였다. 그래도 새출발이니 새로운 마음으로 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다. 얼마 안 가 그 마음은 쉽게 가라앉았다. 사수씩이나 하고 이런 학교에 왔냐는 시선이 느껴졌다. 가뜩이나 정신병이 있는 나로서는 그런 게 아니더라도 괜히 내가 찔렸다. 학교에서 완전한 아싸가 되어 몇 안 되는 아이들과 어울렸다.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했고 캠퍼스 라이프 따위는 누리지도 못했다. 나는 원주에 있는 학사에 들어가 지냈다. 얼마 가지도 않은 학교는 1학기 중간고사를 이후로 아예 나가지 않았다. 학사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고 학사생들과 술을 마시길 반복했다. 그러던 중 아주 우연한 계기로 영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미디어센터라는 곳에서 단편영화를 제작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 나 영화 만들고 싶어 했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운명과 같이 불쑥 강의신청을 했다. 재미있었고 처음으로 작업하는 설렘을 느꼈다. 그렇게 몇 안 되는 좋은 기억 중에 하나로 남아있다. 강의를 통해 나는 약간 신이 나있었고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되었다. 이제 나의 감정은 계절에 따라 널뛰었다. 봄과 가을에는 우울했고 여름과 겨울에는 들떴다. 아무리 약을 잘 챙겨 먹어도 감정기복은 가라앉지 않았다. 널뛰는 감정기복에 의해 내 인생은 뒤죽박죽 되어 갔다. 들뜬 겨울에 아버지에게 자퇴를 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그렇게 대충 다닌 대학생활은 1년을 넘기지 않고 끝이 났다.
지훈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 같은 반이었지만 미술학원을 다니던 무렵부터 그와 친해졌었다. 그는 허점이 많아 보이면서도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모습은 학교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 안경을 고쳐 쓰는 게 절로 상상이 되었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었다. 솔직히 처음 친해질 당시에는 그를 많이 무시했었다.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아예 들지 않기도 했었다. 그래도 매일 미술학원에서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그와 나는 정치와 철학에 관심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의 지식을 공유해 가면서 차오르는 고양감을 느꼈다. 어느 날은 혁명가가 어느 날은 철학자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게 그와 나는 매일 얘기를 해댔다. 그도 나도 원장 덕분에 재수를 하게 됐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말 그대로 절친이 되었다. 그의 얘기를 굳이 따로 하는 건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다는 것과 나는 어쩌면 그와 연애를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주 자주 만났다는 이유에서다. 물론 내가 연애를 못 해 왔기 때문에 그를 자주 만난 것도 있다. 내가 봐도 나는 구렸다. 입시를 망쳤을 때도, 계속해서 정신병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그런 구린 나를 그는 잘 챙겨주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사는 게 점차 좋아지는 것 같았고 나는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약간은 시샘이 들기도 했고 결국 절연을 했다. 이제는 만나지 않게 된 그를 가끔씩은 떠올릴 때가 있다. 그래도 더 이상 그에게 연락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그와 연인 사이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훈이는 춘천에 대학에서 철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 나는 역시 그와 자주 만났다. 그렇게 그와 산책을 하며 시간을 때우듯 보내다가 아버지는 나에게 아무거나 해보고 싶은 걸 하라고 했다. 이제는 지원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한치에 망설임도 없이 영화 제작을 하고 싶었다. 춘천에는 없었지만 서울에는 당연히 미디어센터가 있었고 단편영화제작워크숍을 신청했다. 시나리오, 촬영, 편집까지 전부 다 해볼 수 있는 값진 기회였다. 기껏해야 원주에서 잠깐 영화 제작을 기웃거린 게 전부였던 나는 무척이나 설레었다. 그렇게 감독님과 만났고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과제와 함께 강의는 시작됐다. 단편영화 한 편을 먼저 봤다. 간단한 설정만으로도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를 보며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나의 첫 시나리오는 자살을 결심한 남자가 근처에 자살을 시도하는 여자를 말리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처음치고는 잘 썼다고 생각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누가 잘하든 상관없이 순수하게 영화 한 편 만들어 보겠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나는 누가 먼저란 말 따위는 필요 없이 정직하게 강의에 참여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돌아가면서 배우가 되기도 스텝이 되기도 감독이 되기도 하면서 정말 재미있게 찍었다. 하나 같이 완성된 영화는 볼품없었지만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 와중에도 감정기복은 여전했고 워크숍을 듣는 시점에서는 가라앉는 기분을 영화를 제작할 때는 들뜨는 기분으로 보냈다. 병도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나를 막을 수 없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워크숍이 끝이 나고 허무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는 다시 공허한 삶으로 회기 했다. 어느 날은 함께 워크숍을 들었던 누나로부터 부탁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영화를 찍는데 제작을 도와달라고 했다. 마침 할 것도 없었고 나는 좋은 기회도 되겠다 싶어 무조건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호감이 생겼고 또 한 번 차이고 말았다.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과 다신 연락하지 말라는 말로 그녀와의 연은 끝이 났다. 가뜩이나 자신감이 결여된 나는 적지 않은 실망감을 끌어안아야 했다. 아버지는 슬슬 나를 마뜩지 않아했다. 게임만 하고 퍽하면 술 마시러 나가고 용돈을 자꾸 달라고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답답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게 무척이나 겁이 났다. 어렵지 않을까 실수하지 않을까 힘들지 않을까 시작하기도 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