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망상이 찾아오고 나서
내가 위대한 구원자가 아니라 초라한 정신병자라는 사실이 한없이 나를 허탈하게 했다. 기운도 나지 않았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단서에서 병명의 첫 글자로 적힌 상세불명이라는 단어가 더욱 야속하기만 했다. 퇴원을 하고 한 동안 또 기운 없이 지냈다. 거의 침대와 한 몸이 되듯 붙어 지내기만 했다. 기운이 좀 날 무렵부터 앞으로 무엇을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대학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을 다시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던 걸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 내가 제일 흥미롭게 생각하는 걸 해야 좀 기운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 잘 돼서 인서울을 하면 정신병도 만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딱히 열심히 하지도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지도 않는 그저 그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친구들의 부름에 술을 마시다 들어오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나의 모습은 이제 구원자는커녕 구제불능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퇴원을 했지만 약은 계속 먹어야 했다. 나는 어느 순간 약을 먹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우울한 기분이 다 약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고 약을 먹지 않으면 다시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았다. 이 찌질한 모습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어 보였다. 병 때문에 약 때문에 내 인생은 망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한동안 약을 먹지 않았고 자신감이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적중했다. 우울감은 날아가고 다시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수능을 보고 대충 점수를 받은 시점이었다. 본격적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나는 다시 구원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미술 학원에서 태연한 척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나는 울고 있었다. 왜 울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서러움이 담긴 눈물이었다. 붓을 한 번 두 번 휘갈기면서 눈물울 뚝뚝 흘렸다. 눈물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그런데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원생들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무관심이 낯설게 느껴졌다. 약간의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하고 구원자로서의 책임감이 생기기도 했다. 그다음 날부터 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집에서 책이고 잡지고 할 것 없이 읽어대며 사인을 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미친 듯이 또 바깥을 쏘다니기도 했다. 내가 구원자인데 무엇을 어떻게 구원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중 화장실 변기에 얼굴을 씻어내기도 하면서 답답함을 씻어내려고 했다. 두 번째 망상의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여러 번의 망상을 거듭하면서 기억이 흐릿해진 것 같다. 답답함이 차오를 즈음에 다시 입원했고 다시 난동을 피웠으며 결국 진정제를 맞았다. 병원 생활은 전보다는 뭔가 삭막한 느낌이었다. 다른 환자들과 싸우는 날들이 많아졌다. 어느 날 밤은 술중독 환자가 들어왔는데 나와 비슷하게 고레고레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와 나는 친해졌고 고스톱을 치거나 탁구를 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일찍 퇴원을 했고 나는 다시 병원에서 혼자가 되었다. 전보다는 쉬이 환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생각보다 병원생활을 덤덤히 할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전보다는 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이른 감이 있어 보이는 때에 퇴원을 했다. 그런 나를 새엄마는 노삼초사하며 지켜봤다. 그녀는 그때에 나를 회고하면서 행여나 다시 집을 확 나가버릴까 걱정했다고 한다. 군대를 면제받았고 대충 받은 점수를 가지고 원주에 있는 사립 대학에 들어갔다. 나에게 들뜬 미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