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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라 Nov 20. 2020

여름과 함께 보낸 임신 중기

13주~20주 일기

임신 중기는 정말 빨리 지나갔다. 임신이 체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몸도 별로 아프지 않고 체력도 초기보다 훨씬 나았다. 가끔은 내가 임산부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찌나 빨리 지나갔는지 벌써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어 그 끝자락을 붙잡고 써본다.


13~14주 차, 남편 출장이 드디어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부산으로 출장을 간 터라 이번 기회에 남해로 놀러 가기로 했다. 일기예보가 먹구름으로 휩싸여있어 가기 전부터 걱정이 한가득이었는데, 지내는 동안 다행히 날씨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잔뜩 신나서 내가 날씨 요정인 덕분이라며 생색을 냈고 남편은 그저 허허 웃었다.


배는 제법 나왔지만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여서 사진도 많이 찍었다. 독일 마을, 원예예술촌, 다랭이 마을, 상주 은모래비치를 다녀왔고, 독일마을에서 무알콜 맥주를 찾아 신나 하며 바비큐와 한잔했다. (참고로 무알콜 맥주도 1% 정도의 도수는 있다고 한다.) 날씨는 비가 왔다 해가 났다 변덕스러웠지만 그것마저도 좋았다. 남편은 부산에서 차로 출퇴근을 하며 그새 운전실력이 늘었는지 꼬불꼬불한 해안도로도 곧잘 다녔다. 12년 간의 뚜벅이 생활에서 드디어 졸업이었다.


15~16주 차, 차멀미처럼 옅게 하던 입덧도 끝났다. 이쯤 뱃고래가 늘어나서 정말 끝없이 먹었다. 한 번은 시댁이랑 중식당에 갔는데 아버님이 내가 먹는 양을 보고 당황하셨다. 이때 들어가는 대로 먹어도 되는 건 줄 알고 계속 먹었는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이 시기에 살이 부쩍 올라 결국 식단관리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16주 차에 설이 성별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은근 딸을 바라긴 했지만, 매번 태몽을 반대고 꿔주셨던 친할머니가 꽃 태몽을 꾸셨대서 당연히 아들일 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있었는데 너무 의외였다. (꽃 태몽 중에 아들 태몽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은 딸 태몽으로 풀이된다고 한다.) 남편은 벌써부터 딸바보 영상을 찾아보며 설레 했고, 나는 우리 애가 우리를 닮으면 저럴 리가 없을 테니 꿈깨라 했다.


17~18주 차, 코로나가 다시 심해졌다. 이제 셔틀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는 것도 걱정되어 본격적으로 운전을 배우기로 했다. 운전연수를 20시간이나 들었는데도 운전이 많이 늘지 않은 터라 처음에는 진땀을 뺐다. 남편의 끊임없는 잔소리를 들으며 3일간 맹훈련을 한 덕분에 회사 정도는 혼자 가도 될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코로나 시국에 운전을 배워둔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18주 차 3일, 처음으로 태동을 느꼈다. 뱃속의 아이가 살아있는 걸 확인하기 위해 병원 갈 날만 기다렸었는데, 드디어 태동으로 생명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2주 동안은 이게 장운동인지 애가 움직이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움직임이 미약하긴 했지만, 위치가 장이나 위가 있는 곳이 아니라 아기겠거니 했다. 회사에서 회의 시간에 태동을 느낄 때면 왠지 모를 반가움에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19~20주 차, 코로나 격상으로 인해 임산부 등 몇몇 사람들에게 한정된 재택근무가 시작되었다. 안 그래도 코로나 때문에 회사를 다니는 게 걱정되던 참이라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모든 인원이 재택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눈치가 보이기도 했다. 아낀 출퇴근 시간만큼 추가 근무를 하며 회사에 출근할 때보다 더 많이 일하려고 노력했고, 다행히도 새로 바뀐 파트장은 내 노력을 알아주었다. 임산부란 이유로 내쫓긴 게 얼마 전이었는데, 더 좋은 파트장을 만나 다행이었다.


이쯤 남편 생일과 우리 기념일, 내 생일이 있었는데, 코로나가 심해져서 번듯한 레스토랑 한 번 갈 수 없었다. 생일 축하는 잠옷 차림으로, 작은 홀케이크, 꽃다발과 함께 조촐하게 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많은 친구들이 멀리서 축하를 보내준 덕에, 남편과 설이와 함께해서, 충분히 행복한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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