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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스 Jul 19. 2024

사이폰처럼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열정이 없어도

커피를 내리는 방식도 이렇게나 다양한데 말이야

핸드드립에 푹 빠져있던 내게 흥미로운 주간이 열렸다. 기계로 커피를 추출하는 에스프레소 음료도 아니고 핸드드립 커피도 아닌 수제 커피를 내리는 다양한 방식이 그 주제였다. 터키식 커피인 이브릭은 가늘고 곱게 분쇄된 커피 원두와 물을 함께 넣고 끓이는 방식이었는데 맛을 보니 아주 진하고 가루가 같이 씹히는 게 텁텁했다. 이때 사용한 구리 포트가 참 예뻤다. 이브릭으로 커피를 마시게 될 일은 없을 테지만 탐이 나는 걸. 


눈으로 마시는 커피라 불리는 사이폰 도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 데 아래 둥그런 비커에 물을 담고 윗 플라스크에는 융필터와 원두를 넣는다. 물이 담긴 비커를 가열해 생긴 증기압으로 물이 관을 통해 올라가고 다시 비커로 내려와 커피가 추출이 되는 원리이다. 알코올램프를 사용해서 비커를 가열하니 시간이 지나 윗 플라스크의 커피가루가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불을 줄이고 주걱으로 잘 섞어주는 작업을 해주는데 어릴 적 과학 시간에 실험실에서 실습하던 때가 떠올라 신기해 꺄르륵 웃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행복해하던 고등학교 학생 때처럼. 시각적으로도 훌륭하다. 알코올램프에서 올라오는 파란 불빛도, 커피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현상도, 위로 올라간 물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커피가 추출되는 이 재미난 과정은 확실히 눈길을 끈다. 사이폰 커피의 맛은 높은 온도의 물에 분쇄된 원두 접촉 시간을 길게 해 줘 향미가 극대화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반 작업을 잘 안 해주거나 시간을 잘 못 맞추면 커피가 쓰다. 사이폰을 다루는 바리스타를 사이포니스트라 분리해 부르는 걸 보면 사이폰 커피도 인기가 많은 커피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번에 사이폰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지만 말이다. 이 외에도 모카 포트뿐 아니라 찬물로 오랜 시간 내리는 더치커피, 콜드 브루까지. 생각보다 커피를 만드는 방식이 다양하다.



애정하는 친구가 호주로 놀러 왔다. 내가 있는 곳으로 초대하고 싶었지만 비행기 값이 비싸기도 했고, 아직 여행을 많이 못 해본 터라 새로운 곳에 가 보자는 의미에서 내가 있는 퀸즐랜드 주가 아닌 정 반대편의 서호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를 보러 호주까지 날아와준 친구가 정말 고마웠다. 당시 친구와 인터뷰를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같이 했었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퍼스 시내를 돌아다녔다.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매일 카페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내에서 지내다 차를 빌려 짧게 로드트립도 다녀왔다. 호주에서의 첫 운전이었다. 주유할 곳이 많지 않은 서호주 도로에 설상가상으로 데이터도 터지지 않아 속으로 울며 주유등이 켜진 채 70킬로 넘게 운전을 하게 된 것 빼고는 순조로운 여행이었다. 어마어마한 하루 운전량으로 이미 해가 진 뒤 피나클스 사막에 도착했다. 사막 한가운데 걸어 들어가 드러누웠다. 별을 보며 누워있으려니 무지개다리를 건넌 막내 생각이 났다. 그리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러나오려던 찰나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는 친구 덕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지구의 자전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따금씩 반짝하고 빛을 내는 별똥별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그때 친구가 나에게 툭 던지듯 내뱉었다.


'너는 더 재밌게 살 줄 알았어. 나는 네가 더 많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호주에 온 지 7개월이 되던 시점이었다. 사실 미국에 두 달 다녀왔으니 엄밀히 말하면 호주에서 5개월을 지낸 셈이다. 새 일자리를 얻었고, 서핑도 가끔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고 싶은 곳에 가려면 한 시간 간격의 버스를 기다려 탑승한 뒤, 어딘가에서 환승해서 빙빙 돌아가야 했다. 그 불편함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비싼 렌트비에 허덕이며 최대한 돈을 덜 쓰려 노력하고 자주 주저하며 살아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취해왔던 생활방식 그대로, 관성대로 살아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살던 대로 사는 것, 그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궁금해졌다.


10일 남짓의 짧은 여행이 끝나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퀸즐랜드로 돌아왔다. 나를 가장 옥죄고 있던 주거비에서의 해방을 위해 차를 샀다. 속전속결로 첫 인스펙션 본 차를 사버렸다. 그리고 차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모든 게 다 불편했다. 화장실도 없었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샤워실도 없었고 밤에 주차할 곳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의지와 적응의 한국인이지 않나. 곧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도, 공용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서핑을 매일 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과 가까운 삶을 살게 되면서 자주 행복했다. 지붕 있는 포근한 집을 포기하고 얻은 기회들이다. 환경을 바꾸니 주변 사람들도 바뀌었다. 10년째 캠핑카로 전국 여행을 다니는 노부부, 차에서 살며 로드트립을 하는 친구들, 서핑에 미쳐서 하루종일 서핑을 하고 바다 앞에 사는 사람들, 캠핑장에서 장기 숙박을 하며 텐트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비싼 렌트비 때문에 혹은 집이라는 공간에 얽매이기 싫어 차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만났다. 


커피를 내리는 방식이 그렇게나 많은 것처럼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잊고 있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걸.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열정이 없어도, 빠르게 성취해 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방울 씩, 한 걸음씩 느리게 살아내어도 다 괜찮다고.


애정하는 친구와 플리맨틀의 추운 거리를 거닐다 마신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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