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드립의 매력
어떤 커피를 좋아해요?라고 묻는 선생님의 말에 처음 학원 등록하러 온 나는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했다. '제, 제가 아는 커피는 아메리카노와 라떼밖에 없는 데 말이지요. 저는 라떼를 좋아하는데요'라고 얘기했다가는 실망하실 것 같은 분위기라 커피를 잘 몰라서요, 허허. 그렇게 웃음으로 무마해 버렸다.
우리가 많이 접하는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등의 메뉴는 가압식 방식으로 추출된다. 커피 기계에 커피 가루를 넣고 압축시켜 단시간에 추출하는 것이다. 달임식의 대표적인 예는 터키쉬 커피다. 커피와 물을 같이 끓여주는 것. 침출식은 물과 커피를 용기에 담아 오랜 시간 우려내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소개할 여과식이 핸드드립, 즉 필터커피다. 중력을 이용해 물을 붓고 필터지로 여과된 커피를 담아내는 것. 쓸데없는 데에서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내겐 기본이 되는 이 자연스러운 커피가 매력적이라 느껴졌다.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이 참 예뻤다.
핸드드립 커피는 추출 시 전 과정을 지켜봐야 하는 섬세한 작업이 수반된다. 우선 뜸을 들여야 한다. 커피의 풍미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이 단계가 가장 중요한데 물을 뿌려준다는 느낌으로 가느다란 물줄기로 불려주는, 나에겐 가장 어려운 단계다. 그다음 1차 추출 시 주전자를 돌리는 폭, 속도, 궤도를 지켜 적당량의 물을 부어준다. 1차 추출이 끝나면 뒤이어 빠르게 주전자를 돌려주며 궤도를 지켜 추출하는 2차, 그리고 3차 추출까지 마무리하면 끝이 난다. 20g의 원두로 200ml의 커피를 내리는 드립 커피. 이렇게 적는 것만으로 어려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따라오지만 주전자를 굴려가며 초코 머핀이 오븐 안에서 구워지듯 예쁘게 부풀어 오르는 커피빵을 보면 기분이 몽글몽글해진다.
호주에서 사는 동안 로드트립을 세 번을 떠났다. 그중 내가 살던 지역인 누사에서 타즈매니아 섬까지의 마지막 로드트립이 가장 길었다. 나는 닛싼 엑스트레일로, 일본인 친구 두 명은 팔콘으로 차 두대에 사람 세 명이 떠났다. 우리 다 무던한 편인지라 7,000km를 이동해야 했는데 중간중간 친구네, 혹은 친구의 친구네에 들러 소파에서 잠을 청하는 카우치 서핑을 하곤 했다. 대부분은 길에서 잤지만, 차에서 자는 것보단 소파가 훨씬 쾌적하니까. 또 소파를 내어주는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하루 혹은 이틀 머물며 같이 놀러 가기도 하고 주방을 빌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곤 했다. 그렇게 누사에서 브리즈번, 바이런, 콥스하버, 뉴캐슬, 야스, 멜버른을 거쳐 타즈매니아로 가는 페리에 탑승했다.
그렇게 도착한 타즈매니아에 아는 사람이 없던 우리는 줄곧 차에서 생활을 했다. 샤워시설을 못 찾을 때는 며칠 가량 씻지 못할 때도 있었다. 물론 괜찮았다. 그런 우리가 일어나자마자 꼭 챙기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모닝커피였다. 커피 없인 못 사는 일본인 친구 리에는 아침에 커피를 어김없이 내리곤 했다. 원두를 갈아 프렌치 프레스에 뜨거운 물과 함께 부어 우려냈다. 물론 커피에 ㅋ자도 모르는 나는 그것이 침출식이었는지 여과식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니 그것이 프렌치 프레스였다는 게 떠올랐다. 커피는 주로 두 친구가 즐겼지만, 솔솔 풍겨오는 커피 냄새로 맞이하는 아침이 나는 마냥 좋았을 뿐이다.
딱히 계획이 없는 로드트립을 하다 보면 자연을 자주 마주한다는 점이 좋았다. 아침 햇살이 주는 나른함에 우리는 한껏 관대해졌다. 서두를 게 없었다. 커피의 시큼 달달함을 즐기며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다. 바다 앞에 차를 주차해 두고 낮잠을 청하다 보니 마칭 벌레가 얼마나 냄새가 고약한 지도 알게 되고, 쿠카바라의 괴상한 웃음소리가 얼마나 시끄러운지도 알게 되었다. 반짝이는 윤슬 위에서 파도를 온전히 느꼈고 서핑이 끝나고 웻수트를 차 위에 올려둔 채 잔디밭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해가 뜨고 지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도 놓치지 않았다. 해가 지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야생동물들의 발자국 소리, 벌레가 우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자연의 모든 자극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 행복이자 영감이었다.
며칠 전 센서리 수업을 들었다. 왜, 원두를 사면 패키지에 초콜릿, 라즈베리, 살구 이런 키워드들이 붙어있지 않나. 컵노트를 적는 방식에 대해, 맛 표현의 기준에 대해 구체적으로 나눠봤다. 아우,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오미에는 단맛, 신맛, 쓴맛, 짠맛, 감칠맛이 있다. 이 맛들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는 지, 맛과 향의 조화를 설명해 내는 작업이 센서리다. 먼저 원두를 갈았을 때 나는 드라이 아로마, 커피를 내렸을 때 나는 웻 아로마, 마셨을 때 플레이버, 바디감은 어떤지 클린컵은 깔끔한지, 깔끔한 편인지, 애프터 테이스트는 어떤지 여운이 짧은지 긴지로 나눠 순서대로 얘기하는 게 일반적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드라이 아로마는 초콜릿향이, 웻 아로마는 은은하게 고소한 향이 났어요. 플레이버는 단감의 부드러운 단맛이 주를 이루며 라임 즙의 긍정적인 신맛이 이어졌어요. 바디감은 미디엄, 매끈함은 미디엄플러스, 클린컵은 깔끔했고요. 라임향이 맴도는 오후에 즐기는 티타임이 연상되는 커피입니다.
듣기만 해도 어렵지 않은가. 꽤나 감상에 젖은 시적 표현 같기도 하다. 처음 센서리를 했을 때 표현력도 부족하고 이 맛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많이 했다. 고민하는 동안 커피는 다 식어버리고 내가 고민하던 그 맛은 다 지나가버리고 또 다른 맛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카페인을 과다 섭취해 손이 덜덜 떨리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맛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에 집중하다 보니 좋고, 싫음의 판단에서 멀어지고 내가 느낀 맛이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이 되는지가 궁금해졌다. 음식을 먹을 때, 과일을 먹을 때 조금 더 맛을 음미하면서 섭취하게 된 것도 센서리 수업의 영향이 크다.
커피를 배운 지 4주 차가 된 지금 선생님이 다시 물어온다면 나는 핸드드립을 좋아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자연을 닮은 핸드드립의 매력에 빠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