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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스 May 25. 2021

삶을 그려내는 여유

날씨가 좋아서


구름이 많이 껴 흐리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장마 때 날이 좋지 않다고 표현했다. 매일 일기예보를 파악해야 했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비상근무를 서야 했던 서러운 대리 시절,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어서 그런지 지금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설렘과 동시에 '운전 위험하겠다', '하이고, 눈 언제 쓰나'와 같은 생각이 찾아온다. 


다이버나 서퍼들에게는 너무 쨍하지 않은 약간 흐린 날이 좋은 날이고, 비가 오는 날의 운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 좋은 날인 것처럼 나에게는 해가 쨍한 날이 좋은 날이다. 구름이 적당하게 해를 가려주는 날씨를 좋아한다. 날씨가 안 좋은 날엔 괜히 우울했고 아쉬웠다. 특히 여행 갔을 땐.


평화롭고 조용한 이 곳(요양하러 조용하고 외딴 곳에 내려와 지내고 있다)에 내려온 이래로 계속 날이 좋았다. 비가 자주 내리는 지역인데 스스로를 날씨 요정이라고 칭해도 될 만큼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날이 좋든 좋지 않든 그냥 나가지 않았다. 침실, 명상이나 요가를 할 수 있는 공간,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 주방이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존중해주고 서로의 공간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굳이 나갈 필요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내려왔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고 혼자 남았다. 그들이 떠났을 땐 덤덤하게 담에 보자, 하고 쿨하게 보냈다. 불구하고 하룻밤 자고 다음날 깨어 밖에 나가 '그래 이제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겠군'하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러니까 그제서야 내가 혼자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고 그 공간엔 쓸쓸한 공기가 채워졌다.


많은 사람들을 들이고 내보내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이런 크고 작은 이별이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또다시 공허함이 마음을 두드린다. '너 그동안 많이 채워졌지? 이제 내가 다시 비워줄게'하고 원한 적 없지만 마음 비우기가 시작됐다. 4일 만에 버스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40분을 기다려 버스를 타고 표선해변에 내렸다. 여러 겹의 추억이 얹혀있는 표선 해변은 나에게 조금 특별하다.


표선해변











대정에서부터 여섯 번의 히치하이킹으로 8시간이 걸려 여기에 도착했다. 너도나도 앞장서서 물 빠진 해변까지 뛰어가면서 성공적인 여정 끝에 느꼈던 감정, 기념 사진을 찍겠다고 삼각대를 세우고 타이머를 맞춰 뛰던 기억,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표선에 집을 구해 같이 살았던 추억. 그 모든 것들이 떠오르며 겹쳐지는 여러 명의 얼굴들.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바다로 걸어 들어가며 뜨레스에게 배운 걷기 명상을 시도해본다. 발바닥이 모래 바닥과 맞닿는 촉감을 발 뒤꿈치에서부터 발가락까지 하나하나 순차적으로 느꼈다. 그 어느 해변보다 잔잔한 바다에 발을 댄 순간 생각보다 차가웠던 물에 짜릿함과 설렘을 느낀다. 점차 걸어 들어가면서 이러다 물이 목 끝에 찰 때까지 걸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방향을 바꿔 물가를 따라 걸었다. 체중을 발로 그리고 해변으로 전달하면서 나의 발과 발 주변 흙이 다져지며 생기는 물의 이동을 한참 쳐다보다가 생각한다.


어렸을 적 나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 작은 조각의 그림을 스케치북에 붙여놓고 그림 그리기 많이 했다. 나는 따라 그리는 걸 정말 잘했다. 곰 그림이었다면 누가 봐도 곰의 형태로, 거의 복사기처럼 곧잘 따라 그리곤 했다. 그리고 커서는 자연을, 사람을, 사물을 실제와 비슷하게 재현해 내는 걸 좋아한다.


근데 여행을 할때도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왜 나의 삶을 묘사해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소중한 추억들을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이렇게 그려내고 싶고 묘사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갖지 못했던 여유를, 그리고 앞으로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그 여유를 어떻게 지켜내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오늘 날씨가 좋으니까 지금부터 나를 그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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