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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라스 Jul 20. 2021

가끔 보물상자 열어보기

summer santa의 추억


오랜만에 책장 맨 위에서 먼지가 쌓인 보물상자 하나를 꺼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받았던 편지들을 한데 모아 보관해놓고 있었다. 내가 버리지 말라고 말라고 해서 엄마가 꾸역꾸역 담아 놓은 것들이었다. 초등학교 때 단짝 친구와 우정 펜팔을 썼던 창피한(?) 과거가 담겨있는 다이어리도 있었다. 차마 오글거려서 읽지는 못했다. '미스터 케이', '와와 109'라고 화려한 편지지들이 가득한 월간 잡지에서 뜯어낸 편지지도 남아있었다. 엄마 미소를 띠며 추억에 잠겨있다가 뚜껑을 닫았다.


파란만장한 우정의 역사가 담겨있는 추억의 종이 상자 옆엔 약상자처럼 생긴 다른 보물상자가 있다. 둥지를 떠나 첫 배낭여행을 떠났을 때의 추억들(주고받은 편지, 엽서, 티켓, 메트로 티켓, 도록 등)이 있었다. 그리고 작게 접힌 종이들을 펴보니 삐뚤빼뚤하게 영어로 적힌 색종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꿈과 마음이었다.






중학생 때였나? 미술을 제대로 배우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걸 알게 된 후로 난 공부가 가장 공정한 거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그냥 오래 앉아서 노력하면 성적에 그대로 반영된다고들 얘기했고, 나는 그대로 믿었다. 결국 가난을 공부로 극복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거 해보고 싶어!'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어린이였다. 어떤 걸 배우는지도 몰랐던 이공계열 대학교에 성적 맞춰서 입학했다. 새 학기에 동아리 홍보를 하느라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선배들 사이에 서있던 어리바리해 보이는 나를 발견한 선배는 나를 동아리방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나는 봉사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다.


계절별로 농촌봉사활동을 가기도 했지만 주로 교육 봉사를 했다. 복지관에서 요일 교사로서 방과 후 학습지도를 했다. 아이들은 낯선 사람인 나를 경계했다. 물론 수학이나 국어, 영어를 제대로 가르쳤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주로 나의 이야기를 하거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 어디서 상처를 받았는지 들어주기만 했는데도 아이들은 천천히 마음을 열었다. 그때다. 공부라는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교육마저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건 아니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꿈을 꿨다. 교육에서 소외된 아이들에게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학교를 짓고 싶다는 꿈.


방과 후 학교 교사 프로그램에 지원해 매주 소외계층 아이들의 방과 후 학습을 도왔고, 전교생이 단 몇 명인 산골짜기 시골 학교에 가서 방학기간 중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가 함께 놀기도 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해외 봉사활동 지원 공고가 눈에 들어왔고, 'summer santa'가 되어 필리핀의 작은 학교에까지 흘러들어 갔다. 꽤 열심히 준비했다. 무대 벽화를 꾸밀 페인트, 시안 그리고 매일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할 수업 자료(부채 만들기, 투석기 만들기, 한글 교육 및 명찰 만들기, k-pop 골든벨 등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이들과의 소통에 필요한 열린 마음.


매일 아침 '지프니'를 타고 학교로 가는데 도착할 시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오는 아이들이 매일의 행복이었다. 들판에서 주운 꽃으로 만든 팔찌, 색종이에 사인펜으로 쓴 작은 편지, 그리고 환한 웃음을 날마다 아낌없이 주었다. 어느 날은 수업을 마치고 마을을 둘러봤다. 깨끗한 식수를 먹기 어려워 강까지 매일같이 양동이를 들고 걸어가 보기만 해도 깨끗해 보이지 않은 시꺼먼 강물을 길어오는 아이들을 봤다. 어떤 학생의 집에는 지붕이 없었다. 우리 단원 팀에서는 몇 가정을 방문하고 금전적으로 작게나마 지원을 했다. 안타깝지만 우리 단원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식수를 위해, 지붕을 짓기 위해 일시적인 금전지원을 해주는 것보다 사실 그들이 스스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건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좋아했던 봉사단원에게 달려가 품에 안겨 엉엉 울었고 아이들을 안아주는 단원들도 펑펑 울었다. 나도 울었다. 아이들은 한글로 쓴 이름과 폴라로이드 사진, 그리고 아래에 자신의 꿈을 한글로 적은 명찰(첫날 만든)을 줬다. 뭐라도 주고 싶은 아이들의 마음을 나는 이 좁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꼭 다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훌륭한 '교육'은 아닐 것이다. 희망, 꿈, 열정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안고 눈물을 훔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 다시 아이들에게 열심히 꿈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의심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게 맞는 걸까? 나는 잘 가고 있는 걸까?


8년이 지났으니 지금쯤 성인이 되어 있을 아이들은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있겠지?


8년 전 추억 속에 머물러 있는 얼굴들






어렸을 적엔 툭하면 편지를 썼다. 남자 친구에게, 생일인 친구에게는 생일이라고, 부모님께는 어버이날이나 결혼기념일이라고... 편지가 상대방을 향한 나의 진솔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해서 혹은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작은 편지지에 꾹꾹 눌러 담았을 장면을 상상하면 소중히 여길 수밖에. 그런 편지를 이제 표현에 인색하단 핑계로 안 쓰게 됐다. 여전히 이쁜 편지지들을 사다 모으면서도 선뜻 편지를 쓸 수가 없었다. 왜인지 이쁘고 좋은 말만 적어야 할 것 같고, 커가면서 점점 줄어만 가는 나의 표현력이 부끄러워서.


코로나가 터지고 한동안 집에서 많은 넷플릭스의 영화, 드라마를 봤다. 새로 올라온 리스트를 쭉 보다가 영화 <시크릿 더 무비>에서 리모컨이 멈췄다. '어? 이거 책이 원작이었지? 볼까?' 자기 계발서에 가까운 책을 어떻게 영화화했을까 궁금해서 많이 고민 안 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는 가족을 찾아온 행운의 남자의 손에 들려있던 봉투에 눈이 갔다. 봉투를 여미기 위해 빨간 스티커 같은 게 찍혀있었는데 그게 너무 궁금했다. 물어 물어 그 스티커의 이름이 '왁스 실링'이라는 걸 알아냈다. 바로 구입했다. 집에 있던 초로 이런저런 색의 왁스를 녹여서 찍어봤는데 그게 재미있었다. 손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또 그렇게 금방 사그라들 열정이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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