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가 행복하니 됐다.
'서핑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180도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접한다. 자유로운 '히피'가 되고 싶어서 시작한 서핑은 내게, 그 비슷한 자유로움을 주었다. 서핑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멋진 일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했다. 절대 떠날 수 없을 것만 같던 서울에서 벗어나게 해 줬고, 집에 대한 생각(인간답게 살려면 꼭 집이 있어야 한다는)을 바꿔주었다. 원래도 정착을 지양하던 내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주었다. 집 없이 전국, 아니 전 세계를 집으로 삼는 노마드의 삶을 꿈꾸게 해 주었다. 서울, 제주도, 그리고 부산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이 이제는 피곤함보다는 설렘으로 다가온다. 서핑하는 삶을 추구한 뒤로 매일 아침 웹캠으로 파도 상태를 체크하는 게 모닝 루틴으로 굳어졌다. 이쁘게 그슬른 피부 자체가 패션이라는 생각으로 옷과 장신구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물에 젖어도 잘 마르는 옷 몇 벌을 번갈아 입으며 언제든 바다에 입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든든한 여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꼭 서핑을 경험해보길 강요하듯 권하는 내 짝꿍의 마음이 나는 백번 이해가 간다.
"있지, 내가 처음 입문 강습을 들을 때 진짜 재미있어하니까 강사님이 그랬어. 안쓰러워하는 표정으로 진짜 안 늘어요-라고."
처음 들었을 땐 대체 어느 누가 입문 강습 때 강습생에게 그런 말을 하나 싶었다. 잘한다 잘한다고 북돋아줘도 모자랄 판에! 아마도 그가 곧 자신처럼 서핑에 빠져버릴 것을 예감했으리라.
그는 초보병이라고도 불리는 JB병(갈비뼈 미세 골절)으로 한동안 서핑을 쉬어야 했지만 잊지 않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고, 아침잠이 많은 나를 끌고 바다에 함께 나가줬다. 그는 그렇게 서핑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었다. 새벽에 물때 맞춰서, 파도를 따라다녔다. 서핑을 하지 않는 시간은 코워킹 스페이스, 일하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며 하루에 8시간씩 주 40시간을 충실히 채우는,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일에 대한 고민으로 채웠다. 그는 여전히 본인 일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일 밖에 몰랐던 그가 라인업에 나가서 사람들과 다정히 인사를 나눈다. 즐겨 입던 세미 정장을 옷장에 처박아두고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어떨 때는 셔츠마저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다. 마음처럼 일이 흘러가지 않는 어떤 날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에 미소를 띨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정말 서핑으로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물이 무서워서 자유형도 못 뗀 내게 바다는 위협적이어서 더 매력적인 존재였다. 서핑을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건 2019년도이다. 프립에서 서핑 트립 캡틴을 했다. 잘 못했지만 그냥 바다로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바다 위에 서핑보드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냥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내가 딱 동경하고 닮고 싶었던 그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웃음이 있었다. 그와 서핑을 다녔다. 양양 죽도해변에 보드를 보관해놓고 주말마다 여행 가듯 고속버스를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오곤 했다. 그리고 여름엔 제주도로 내려와 파도를 찾아 중문으로, 월정으로, 이호로 서핑 트립을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렸을 적부터 운동신경이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초등학생 때는 줄곧 계주 대표를 했고 체력장 1,2위를 다투던 아이였다. 그만큼 승부욕도 강해 꼭 해내고 말았다. 어렸을 때 체격은 고만고만하니까 그 정도 승부욕으로 누구든 이길 수 있었다. 취업 준비를 하다 갑자기 빙벽을 오르고 싶어서 시작한 클라이밍도 같이 시작한 다른 사람들보다도 월등히 빨리 늘었다. 마라톤을 하면서도 체력 좋다는 소리를, 다이빙을 배울 때도 곧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말이지 서핑이란 놈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2년이 되었는데도 말이다. 어떤 날에는 나 레벨업 했어! 하루 종일 방방 뛰며 좋아했고, 그다음 날에는 높은 파도에 겁에 질려 노즈 다이빙으로 물맛만 보고 나오기도 했다. 어떤 날에는 와, 나 자연스럽게 사이드가 되는데? 하며 신나게 타기도 했고 또 그다음 날에는 패들도 엉망, 무게중심도 잘 잡히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그중에도 와, 나 진짜 못한다 하는 날이 있다. 라인업에 나가기 부끄러울 정도로 큰 파도와 많은 사람들에 겁먹어서 마냥 웃기만 하고 시도도 못했다. 사람 많은 곳을 피해 가다 보니 잡히지 않는 파도에서 열심히 패들 하다 힘을 다 뺐다.
서핑을 못해도 바다에만 나오면 그냥 좋아하는 나를 보고 짝꿍은 나 대신 답답해하기도, 모진 말로 나를 닦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다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는 마냥 웃었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나도 잘하고 싶다는 생각, 멋지게 타고 싶다는 생각이 왜 안 들겠는가. 그런 날엔 반성도 하고, 이미지 트레이닝도 하고, 내 서핑 선생님인 유튜브로 서핑 영상을 보고 또 본다.
어느 날, 육지에서 오랜 친구가 내가 사는 동네로 놀러 왔다. 나는 친구에게 파도가 너무 좋다며 서핑 입문 강습을 권했다. 그렇게 친구는 첫째 날 서핑 강습을 받고 그다음 날 보드 렌탈을 할 수 있는 패키지를 등록했다. 가을답지 않게 해가 쨍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바다 컨디션도 좋았다. '파도를 끝까지 보며 패들을 하기'를 잊지 않고 라인업에 나가 첫 번째 파도를 잡았다. 파도가 잡히는 그 느낌이 너무 짜릿해서 금세 행복해졌다. 그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파도. 내친김에 스텝 연습을 하려고 첫 발을 내디뎠다가 풍덩 바다에 빠졌다.
계속해서 깨지는 파도에 라인업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친구를 발견하고 라인업으로 데리고 들어왔지만 얼마 안가 그대로 해변가로 나가버렸다. 내가 사랑하는 바다 위에 누워있는 그 여유와 파도가 스쳐 지나가는 짜릿한 느낌을 알려주지 못해 아쉬웠다. 서퍼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운명의 갈림길에서 친구는 재미있었지만 서핑을 다시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치만 또 누가 알겠는가, 파도를 타고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자신을 떠올리며 어느 겨울날, 문득 바다에 가서 서핑을 해보고 싶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날, 새벽 6시에 기상했다. 친구가 깰까 조심스레 화장실에서 수트를 입는데 부스럭 소리가 났다. 친구가 깼다.
"일어났어?"
"이 시간에 가?"
"응"
"진짜 서핑에 미친 사람들 같아"
맞다, 나도 서핑에 미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래, 네가 행복하니 됐다. 잘 다녀와~"
오늘도 나는 짝꿍의 잔소리를 생각하며 바다에 나간다. 오늘은 어떤 날이 될지 기대감 반, 귀찮음 반을 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