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라스 Jan 05. 2023

0. 호주행을 선택한 이유

도피성 호주 워킹홀리데이


출국날이 다가올 때까지 서울에서의 일정을 빼곡하게 잡아 놓은 과거의 나는 출국을 이틀 앞두고 내가 과연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당일 열릴 파티에 쓰일 보드게임 질문카드를 전날 새벽까지 준비하는 탓에 늦게 잠에 들었다. 아침 9시부터 웅웅 울려대는 귀찮은 핸드폰 진동을 잠재우기 위해 눈을 반쯤 감은 채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나와 이 파티를 함께 준비한 호스트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갑작스런 폭설로 제주-김포행이 결항되어 파티에 차질이 생겼다는 소식이었다. 호스트로서 많이 준비했고 기다리던 시간이었기에 이 소식이 더더욱 슬펐다. 순간 짐이라도 더 싸고 방이라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다행인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또 스을 무너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제는 돌부리가 없어도 자주 주저앉게 됐다. 혼란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지? 나는 왜 존재할까? 우리 집 막내 솜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아빠의 갑작스러운 응급실행을 겪으면서 바이러스, 날씨와 같은 작은 돌부리를 마주할 때마다 감정이 널뛰기했다. 최근 반년 간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간신히 0을 붙잡고 있던 내 감정은 그렇게 점차점차 서서히 마이너스가 디폴트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모든 상황이 나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건 네 길이 아니라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늘이 필사적으로 막는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축복받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외로웠다. 


워홀을 가기에는 꽤 늦은 나이에 비자 신청을 했다. 만 30세, 생일을 한 달 남기고 비자를 받았다. 서핑도 하고 해외에 살면서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도전으로 호주행을 선택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사실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전히 솜이 사진을 보면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고 뉴스에 사고 소식이 뜨면 가슴이 철렁한다. 혹시나 내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까 봐.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버거웠다. 왜,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고 하지 않나. 조금 더 내 욕망에 집중하고 싶었다.





출국 당일, 눈이 많이 내렸다. 기내 탑승 후 지연이 계속 이어졌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축복받고 싶다는 생각이 순식간에 내 감정을 뒤덮었다. 야무짐 클럽 언니들에게 톡을 보냈다.

‘축복해주실 분 찾아요!’


‘잘 다녀오게!’

‘가즈아! 호주 가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내 간절함을 느끼지도, 큰 의미를 담아 한 말도 아니었겠지만 안도가 됐다. 눈물을 멈추고 이륙하는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야무짐 클럽 언니들은 멋진 녀성이다.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그래서 전혀 걱정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정말 찰지게 흡수하고 응용하는 힘을 가졌다. 카페에서 전 남자친구를 마주쳐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내 자리를 지키는 것, 나를 상처 준 사람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날을 기대하며 덧붙이는 멋진 조롱. 우울과 무기력이라는 우물에 빠진 나를 건져내주는 건 그 모든 감정을 가볍게 만드는 대화다. 




우리 열심히 말고 야무지게 살자.


‘글’과 ‘음식’이라는 매개로 묶인 이 클럽이 너무 따뜻했다. 전기장판이 뜨끈하게 자리하고 있는 포근한 이불처럼. 와인과 마늘 떡볶이, 옛날 통닭 그리고 묵사발을 곁들여 이야기 꽃을 피우곤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닥글(닥치고 글쓰기) 시간. 잔잔하게 흐르는 BGM과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채워진 포근한 공기.


호주에 왔다. 야무짐 클럽 멤버들만 두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뭐, 정확히는 각자의 영역에서 멋짐을 담당하고 있는 그들을 멀고 먼 오지 땅에서도 놓칠 수 없었던 나의 질척거림에 더 가깝다.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2022년 12월 21일에 출국을 했다. 그리고 2022년 12월 22일 오전 10시 30분에 시드니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연휴와 새해를 호주에서 보내게 됐다. 뭘 하고 살 지, 뭘 하고 싶은지, 어딜 갈지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다 기록할 거다. 뭐가 되었든, 야무지지 못한 순간도 야무졌던 순간도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순간도 반짝반짝 빛날 순간도 전부 다.


지금도 여전히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지만 앞으로도 '글'이라는 매개로 뭉친 야무짐 클럽 멤버들에게 나의 소식을 편지로 전하리라는 계획을 야심 차게 세웠다. 나를 힘들게 하는 모든 걸로부터 떠나 온 도피성 호주행이니 만큼 하고 싶은 걸 한껏 시도하고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지. 





* 한 달에 한 번, 야무짐 클럽 멤버들에게 엽서를 잊지 않고 꼭꼭 보낼 거예요. 일 년 동안 살게 될지, 반년 뒤에 돌아오게 될 진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 잊지 않고 편지를 쓸 거예요. 이제 저는 기록의 힘을 아니까요. 아주아주 개인적이고도 뻔한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되겠지만요. 한 달에 한 번 전하는 심심한 제 워홀 생활기가 궁금하시다면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그래서 내 취향은 뭐예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