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인물 Hint : Kangaroo, Sea, Coffee
오랜만이에요. 추운 겨울 잘 보내고 있나요? 호주는 한국이랑 계절이 정 반대라 더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어요. 편지를 적고 있는 오늘은 호주에 와서 처음 정착한 woolgoolga라는 동네에서의 마지막 날이에요. 뉴사우스웨일스(NSW) 주에 속하는 작은 바다마을인데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궁금하겠죠? 과일을 좋아하니까 과일 농장에서 일해보고 싶다, 그런 막연한 생각이 있었거든요. 블루베리 농장에서 지금 일을 구한다던데 갈래? 그래, 가보자! 블루베리 피커(picker) 잡을 구해서 온 동네예요. 호주 사람들을 오지(Aussie)라고 부르는데 오지들도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하면 '블루베리 따니?' 물어올 정도로 블루베리 농장들이 몰려있는 곳이죠.
그나저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첫 동네에서 외로움이 사무치는 2주를 보내면서 현타가 왔어요. '나 왜 여기서 블루베리만 따고 있지?', '한국 최저시급을 겨우 받는 생활에 익숙해졌나?', '서핑하러 왔는데, 바다가 바로 앞에 있는데, 왜 가만히 있지?'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Adrian이에요. 휴무날 바다에 나가서 부러움에 입을 떡 벌리고 서퍼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제 옆으로 다가와 묻더라고요.
"Are you a surfer?"
와, 이때다 싶어 우다다 얘기했어요. 서핑하기 어디가 좋은지, 보드는 어디서 빌리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죠. 연락하면 언제든 도움을 주겠다고 하길래 번호를 냉큼 받아왔어요. 그리고 며칠 뒤, Adrian과 서핑을 함께 하게 됐어요. Woolgoolga부터 시작해서 Mullaway, Mullawarra, Arrawarra까지 파도 체크하러 차를 타고 해변가를 따라 이동하다가 Mullawarra에서 짧게 서핑을 즐기고 돌아왔어요. 참, Arrawarra(아라와라)와 Mullaway(뮬러웨이) 사이의 해변을 Mullawarra(뮬러와라)라고 하는 거 너무 귀엽지 않나요? 아무튼 돌아오는 길에 울굴가 비치에 들렀는데 매일 바다에 나와서 연습하라며 7.2ft 펀보드를 쥐어 주고 쿨하게 떠났어요.
그 뒤로 휴무날마다 매일 바다에 나가 작은 보드에 적응하려고 화이트 워시에서 패들연습을 했어요. 한국에서 사용하던 보드는 9.2ft짜리인데 그 큰 튜브를 타다가 작은 걸 타려니 밸런스 잡기가 정말 힘들더라고요. Adrian이 쏘아 올린 작은 보드 덕에 꽤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휴무날 언제든 바다에 나갈 수 있다는 점, 옆구리에 보드를 끼고 왕복 40분을 오르락내리락하는 해변까지의 그 힘들었던 여정이 거뜬해졌다는 점, 그리고 길에서나 해변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가볍게 서핑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는 점이요.
원래도 외로움이 자주 찾아오는 사람인데 낯선 곳에 혼자 오면 심해질 때가 있어요. 아무도 나를 환영해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에서 사무치는 외로움. 누가 가라고 떠밀지도 않았고 내가 선택한, 내가 살 동네를 찾는 신나는 여정이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그런 감정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보드를 들고 집에서 나서는 길에 잔디 깎는 앞집 아저씨, 길에서 차를 잠시 세우고 파도 얘기를 하는 오지 서퍼, 보드를 들고 낑낑대며 걷다가 만나는 할아버지 서퍼, 그리고 매일 이 동네에 사는 누군가와 스몰톡을 주고받았어요.
- 오늘 날씨 좋다.
- 오늘 파도 좋니?
- 보드 멋지다.
- 오늘 서핑 어땠어?
그런 대화를 나누다 보면 호주에서 이방인인 내가 이 타운 어딘가에 속해있다고 느껴졌어요. 보드를 끼고 걸으면 아이언맨 수트를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소속감 같은 거요. 아, 나는 완전한 이방인은 아니구나. 그래도 이 타운의 바다를, 파도를 즐기는 ‘서퍼’에 소속되어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편안함 말이에요. 이 모든 건 첫 오지 친구, Adrian을 만나면서 시작됐어요. 그가 아이언맨 수트를 빌려줘서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어요. 막 호주에 온 나에게 보드도 빌려주고, 서핑 정보도 알려주고, 서핑 스팟에도 데려다줬어요. 그래서 이렇게 헤어질 때가 되니 울컥하는 거 있죠.
처음부터 왜인지 모르게 정이 갔어요. 걸어서 갈 수 있는 해변도 있고 로컬 카페도 있고 호주의 대표 마트인 울월스도 집 가까이에 있었거든요. 문제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많은 일터와 쉐어하우스에 머물다 보니 다시 한국 사회의 버블에 갇힌 것 같았어요. 언어도 문화도 익숙하니까요. 익숙함에 속아 타성에 젖어버린 거죠. 한국에서 해결하지 못한 감정이 그대로 남아있어 문득 찾아오는 괴로움에 북받쳐 울고 있을 때 나도 겪어봐서 다 안다-는 식의 어설픈 위로가 오히려 상처가 됐어요. 저를 갉아먹는 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떠나온 건데 또 제 주위가 가시로 채워져 버렸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벗어나야겠다.
이 동네가 너무 좋지만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어요. 블루베리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따는 것 말고는 이 동네에서는 할 일이 많지 않았거든요. 상점가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고요. 이 지역의 블루베리 농장주는 거의 다 인도인이고 시급제(hourly)가 아닌 능력제(piece rate)로 운영이 돼요. 그래서 저처럼 처음 농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시급의 반토막도 벌기가 힘들었어요.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꽤 적응이 됐지만 호주의 시급(21.38달러)에 상응하는 돈을 벌기엔 역부족이었어요. 물론 농장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시급보다 훨씬 많이 버는 경우도 있었어요. 다만 처음에는 이런 현실이 부당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면 한 달이 지난 지금은 역설적이게도 농장에서 내가 직접 작물을 수확하며 땀 흘리는 경험이 값지다, 내가 소비하는 농작물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떠날 때가 되니 아름다워보이는 걸까요?
아무튼 오늘 밤기차를 타고 새로운 동네를 찾아 떠날 예정이라 오전부터 부랴부랴 울굴가 해변에 가서 파도 체크를 하고 좋아하는 로컬 카페 Will&Co에서 커피를 마셨어요. 아드리안은 플랫화이트, 저는 차이라떼를 주문했어요. 아드리안은 환경 관련 일을 하고 있어요. 멸종위기 동물들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호하는 일. 그래서 번잡한 도시에서 자란 제게 꽤 흥미롭게 보이는 이 직업에 더 관심이 갔어요. 체리 농장에서 시급 3불을 벌어본 경험이 있다는 그는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고 서핑을 즐기고 또 취미로 밴드를 해요. 드러머인데 매일 연습을 하러 가느라 하루가 빽빽하죠. 약속 잡는데 얼마나 힘들었던지. 또 말하는 걸 좋아하고 (감사하게도) 오지랖이 넓은 것 같아요. 생전 처음 보는 저한테 보드를 선뜻 빌려준 걸 보면요. 하하.
커피를 마시고 일어나면서 마지막 근무 날 제가 농장에서 직접 따온 블루베리를 통에 담아 선물했어요. 금목걸이(아드리안 왈; 골드코스트 오지는 fake다, 금으로 치장한 American을 따라 한다.) 보다 더 의미 있고 멋진 선물이라며 반갑게 선물을 받아줘서 뿌듯했지요. 그리고 바다에 들어가 울굴가에서 마지막 서핑을 즐겼지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서 아드리안에게 자신의 집 마당에서 키운 바나나 한 송이를 선물 받았어요. 허엉. 또 눈물이 나려고 하는 걸 꾹 참았어요.
It was lovely to meet you. Anytime just call me if you need in a help.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고 헤어졌어요. 새로운 도전을 위해 떠나지만 곧 돌아올 거라고 예고를 했지요. 돈 많이 벌어서 차도 사고 보드도 사서 이 동네에 꼭 다시 돌아와 인터뷰를 할 거라고요. 후! 그럼 저는 이만, 미련의 감정을 가득 남겨둔 채 새로운 동네, 골드 코스트로 떠나기 위해 집 청소를 하러 가볼게요! 또 편지 쓸게요.
2023.01.24. 호주에서 한 달 새 깜깜이가 된 olas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