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에 채워지는 소중한 추억들이 늘어 간다. 비 오는 날이나 눈이 올 때면 다락에 숨겨 둔 곶감 빼먹듯 지난 추억 하나하나를 회상한다. 허나 그 추억의 색깔도 옅어지고 새로운 기억도 쉽게 제자리를 잡지 못한다.
청춘 시절에는 그 긴 '홀로서기'라는 시를 줄줄 외웠고, 벼락치기로도 신비한 시험 성적을 내곤 했었는데 요즘은 예전의 내가 아니다. 금방 읽은 글인데도 머릿속이 하얘지고, 얼굴은 내 앞에 서 있는데 그 사람 이름은 허공에서 내려오질 않는다.
지난 목요일, 같이 일했던 이들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몇 년 만에 보는 이들이라 반가운 마음에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현업에 있는 그들이 1차 계산을 할 테니 2차는 내가 내기로 하고 갈만한 맥주집을 미리 알아둘 요령이었다. 저녁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적당한 가게를 찾아내고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
"000 씨로 예약했는데요?" 예약 보드에 내가 부른 이름이 없자 가게 직원이 당황하였다. 뒤에 서 있던 가게 사장이 다가와 "3명 예약인 가요" 하길래 맞다고 하니 강변이 보이는 통유리 창가 좌석으로 안내했다. 사장이 예약을 받고 직원들에게 미처 전달 못했나 보다 생각했다. 직원이 테이블 위에 놓인 예약석이라는 명패를 치우고 기본 반찬을 세팅해 줬다. 약속시간이 되었으나 그들은 오질 않았다. 현업에 바빠 늦을 거라 애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화를 눌렀다. 메뉴판을 보고 인터넷 기사도 보며 시간을 보냈지만 가게 문으로 그들은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늦으면 미리 연락할 사람들이라 이상했다. 휴대폰 구글 일정 앱을 켰다. 맞다. 장소도 날짜도 시간도. 20분이 지나자 애써 눌렀던 화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지금 온들 그들이야 20분 늦었지만 나는 50분을 기다렸다. 한 시간 가까이 누군가를 기다린 적이 있나 생각해봐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만날 인연이 아니구나 하며 가게를 나왔다. 성큼 다가온 봄인데 갑자기 옷깃을 스치는 바람이 쌀쌀하다. 집을 나올 때 지하철엔 빈자리도 많았는데 돌아가는 지하철 엔 빈자리도 없었다.
불현듯 대학 때 일이 생각났다. 토요일 프로야구를 보면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선배 왜 안 나오세요?"
"엥. 우리가 만나기로 약속했었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선배 학교 앞에서 기다리면 나올 것 같아서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요."
정하지도 않은 약속을 혼자 만들고 후배는 나를 기다린다 했다. 무서운 사람이다. 전화로 후배를 어렵게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때, 만날 약속 없는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번 해볼 만한 거라 생각했었다.
보름 전에 약속을 정한 카톡을 열었다. 장소와 시간을 알려 준 글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럼 금요일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