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닐 때 처음 유럽을 갔다. 거래처 우수 지점장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았다. 해외 가전쇼를 관람한다고 출장 품의를 했지만 실제 내용은 여행이었다. 그때도 한국 기업들이 가전제품 시장을 선도하고 있어서 유럽 회사의 신제품 동향을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를 다녀왔는데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와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가 인상적이었다. 만년설이 만든 청정한 빙하 호수와 웅장한 알프스산맥을 볼 수 있는 할슈타트, 금방이라도 요정이 나타날 것 같은 동화 같은 중세 마을 체스키크룸로프.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하게 떠오른다.
유럽으로 떠나기 전 필요한 걸 아내에게 물었다. "휘슬러" 다른 건 필요 없고 휘슬러 냄비 세트만 사 오면 된다고 했다. 여행 첫날이 독일이었고 다행히 일정에 쇼핑이 있었다. 가이드가 데려다준 가게에서 성공적으로 휘슬러 냄비 세트를 샀다. 아내가 좋아할 생각을 하니 흐뭇했다. 휘슬러(Whistler)가 휘파람을 불었다. 하지만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휘슬러 냄비세트는 사과박스 두 개 정도 부피였다. 그런데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휘슬러 제품은 대를 이어 사용할 만큼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겠나. 첫날은 시내 관광이라 온종일 메고 다녔다. 저녁에 보니 어깨에 빨갛게 줄이 생겼다. 숙박장소도 매일 달라서 열흘이 넘는 일정 동안 버스에 싣고 꺼내고 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아내는 내게서 눈물 나는 휘슬러 구입기를 듣고서는 휘슬러를 창고에 고이 보관했다. 구형 휘슬러 냄비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도저히 아까워서 사용할 수가 없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나서는 딸이 시집가면 혼수로 주자고 했다. 우리 집 발코니 창고에는 십오 년 묵은 휘슬러가 잠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