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 미워 미워
고등학교 입학식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한 후 책가방을 여는데 낯선 편지가 보였다. 분홍색 편지에는 "첫눈에 좋아하게 되었다. 사귀고 싶다."는 같은 반 여학생 K의 당돌한 고백이 담겨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를 얼마나 안다고 좋아한다는 말을 쉽게 할까 이해가 안 되었다. 그 시절 나는 작고 하얀 얼굴, 코스모스처럼 가녀린 몸매, 긴 머리의 말 없는 소녀를 좋아했다. K는 내 이상형과 한참이나 다른 사람이었다.
K의 편지에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K는 나와 같은 동네 사는 여학생을 앞세우고 집으로 찾아왔다. 이상형과 다른 외모도 싫었지만 여학생이 먼저 고백한다든가 남학생 집을 서슴없이 찾아오는 게 더 싫었다. 우리 집을 가르쳐 준 같은 동네 여학생도 싫었다. 이번에는 만나기 싫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나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멈추지 않았다. 소풍 가면 김밥이랑 사이다를 싸서 주고, 수업 시간 내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고, 오락시간에는 교단에 나와 노래를 불렀다.
K는 조용필의 '미워 미워 미워'만 불렀다. "잊으라는 그 한마디 남기고 가버린/사랑했던 그 사람 미워 미워 미워/잊으라면 잊지요 잊으라면 잊지요/그까짓 것 못 잊을까 봐."
K는 나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애절한 K의 시선은 끈적끈적했다. 싫었다. 같은 반 친구들의 시선도 내게 모아졌다. 어디 땅속으로 숨고만 싶었다. K가 곁에 오면 세상이 암흑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고등학교 졸업 하루 전날 K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썼다. 3년 만에 답장을 쓰는 셈이었다. 내 마음을 살피지 않고 내게 돌진해서 많이 힘들었지만 소중한 그 마음은 잊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