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나 삼성이 세계적인 가전 회사로 발돋움하여 제품별로 세계 1, 2위를 놓고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다.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가전 시장은 일본 회사가 주도를 했다. 마쓰시다, 소니, 히타치, 도시바, 샤프, 미쯔비시, 파나소닉, JVC, 산요 등. 일본에는 가전 브랜드도 많고 소비자의 이목을 끄는 혁신 제품도 연이어 시장에 출시되었다.
회사 내에 일본 기업의 혁신 활동을 벤치마킹하는 연수 프로그램이 줄줄이 생겼다. 어느 해인가 우수한 성과를 낸 영업소장을 대상으로 연수단이 구성되었다. 나도 선발되었다. 연수를 가는 영업소장들은 벤치마킹에는 관심도 없고 재미있게 놀다 올 생각만 가득했다. 그런데 연수단에 조직 내 No1인 담당 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3박 4일 연수 기간, 임원은 아침저녁으로 벤치마킹 계획과 실적을 개인별로 보고를 받았다. 안 그래도 임원과 동행하는 일정이라 부담스러웠는데, 연수 와서 날마다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다니 세상에 이건 성과를 치하하는 게 아니라 벌을 주는 것이었다. 모두들 말은 못 하고 속으로 불만이 가득했다.
마지막 날은 연수 계획이 없고 오후 늦게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설마 했지만 임원은 오전 내내 연수실적을 총정리하는 회의를 주재했다. 일이 인생의 전부인 줄만 아는, 참 재미없는 분이셨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서야 회의를 마쳤다. 그것도 막내 소장 두 명이 "공식 보고서를 책임지고 만들어 놓을 테니 나머지 분들은 가까운 곳에 다녀오시라"라고 해서 끝이 났다.
관광지 몇 군데를 구경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무제한 호프집이 보였다. 500cc 호프 네 잔 값을 내면 맥주를 무제한 먹을 수 있었다. 쌓인 울분을 술로 풀 좋은 기회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임원의 건배에 따라 500cc로 원샷을 했다. 사장이 놀란 눈치였다. 이번에는 원샷을 하고 피처 잔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탁탁탁탁탁…. 아홉 명이 순서대로 잔을 내려놓으니 소리가 대단했다. 그렇게 해서 500cc로 다섯 잔을 마셨다. 사장의 얼굴색이 변하고 있었다. 거의 일 인당 일곱 잔을 마시니 사장이 제발 나가달라고 사정을 했다. 무제한 호프집이라고 너무 마셔도 나라 욕을 할 것 같아 그만 자리에 일어났다. 어느새 마음속 가득했던 홧덩어리가 맥주 거품에 사라졌다. 신주쿠의 호프집 사장님 너무 많이 마셔 죄송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