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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디 Dec 27. 2020

찌질한 한 남자의 독백 - 콘트라베이스

파트리크 쥐스킨트 단편소설

'향수'로 유명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소설 콘트라베이스.

클래식과 재즈 연주에서 베이스를 담당하는 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주제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남자 주인공의 독백을 담은 모노드라마 형식의 짧은 단편소설이다.

콘트라베이스라는 악기를 아는가? 첼로보다 2배 정도 큰 들고 걷기조차 힘든 엄청난 크기의 악기.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서든 재즈에서든 연주의 중심을 잡아주기에 없어서는 안 될, 정말 꼭 필요한 악기이지만 실제 연주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존재이다. 소리 역시도 저음이다 보니 다른 악기 예를 들어 피아노나 바이올린 소리에 묻혀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애당초부터 콘트라베이스로 시작한 사람은 절대 없습니다. 그렇게까지 되기에는 다들 과정을 겪게 됩니다. 우연과 실망을 통해서지요."


악기가 가지는 속성 때문인지 소설의 주인공 남자도 악기와 연주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자랑하고 다닐만하지 않은 애매한 존재라 생각한다. 오케스트라가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불만도 많다.
오케스트라에 짝사랑하는 '세라'라는 소프라노가 있지만,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했다. 공연 중에 그녀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오케스트라에서 퇴출당하는 허무맹랑한 망상에 빠져있는 찌질하기 짝이 없는 존재이다.


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 남자의 모습이 때로는 불쌍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 그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정적인 국립 오케스트라 단원, 즉 공무원임과 동시에 공무원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과 그것에서 벗어나는 공상.

우리들이 하는 일 역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콘트라베이스와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 역시 그의 걱정과 같지 않은가?  
나도 직장 상사에게 그동안의 말 못 했던 불만 사항들을 쏟아내고 퇴사를 꿈꾸는 공상마저도 그가 꿈꾸는 일탈과 같지 않는가?


"두려움 때문에 집에 그냥 눌러앉아 있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런 현상을 여러분께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까요? 뭔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고, 가위눌림 같은 것을 느끼며, 이런 안정된 생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공포로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밀폐 공포증이라든가, 고정된 직업을 가짐으로 해서 비롯된 정신 이상증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콘트라베이스를 계속 다루면서 생겨난 거지요.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채 베이스를 자유롭게 연주하며 살 수는 없거든요. 도대체 어디서 한단 말입니까?"

"물론 저는 사표를 던질 수도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죠. 제가 그냥 가서 말만 하면 됩니다. 〈그만두겠습니다〉라고요. 아주 드문 일이기는 합니다만 말입니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이제까지 불과 몇 명 되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합법적인 행동이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는 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자유로운 몸이 되겠죠…….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죠! 그다음엔 무엇을 합니까? 그냥 길거리에 나앉게 되는 겁니다…….
절망적이지요. 어차피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이렇게 하든지 아니면 저렇게 하든지……."

"어쨌든 무슨 일이든지 분명히 일어날 겁니다. 제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겠죠. 제 일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될 겁니다. 그리고 설령 그런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라가 저한테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는 저를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앞으로의 경력이나 인생길에서 저는 언제나 에피소드로 남게 될 테니까요. 그것이 말하자면 괴성을 지름으로써 얻게 된 효과가 되는 셈이지요"


쥐스킨트의 콘트라베이스는 이런 내용으로 책이 될까 싶은 소재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빠져들어있고, 마지막엔 그 안에서의 해학과 통찰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이 짧은 소설에 평범한 삶을 사는 소시민의 고뇌와 환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어찌 쥐스킨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짧기까지 하다.


짧지만 재미있는 소설을 찾는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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