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살아있는 불우이웃"
사람들은 분명 어떠한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그 환상이 그들의 눈을 가린다. 가장 눈에 들어오고 있는 것을 가장 못보게 만든다. 우리가 가끔 왜 이토록 이상하게 사는가의 답은 아마도 이 환상의 문제일 것이다.
그가 어렸을 적에 엄마아빠가 많이 바빠서 할머니에게 키워진 외롭고 아픈 과거가 있다며 내 장난감을 뺏어 그에게 주던 이가 있었다. 참 가엾고 안쓰럽다는 그에게 내 밥을 대신 먹이고, 내 방석을 빼서 그의 엉덩이 아래 대신 깔아주던 이가 있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이는 자신을 대단히 상냥하고 따스한 마음씨를 가진 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홀히 지나쳐가는 마음의 상처를 잘 챙길 줄 아는 배려심이 깊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간주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난 고아인데. 아예 부모가 없고, 위대한 유산도 없으며, 내 것을 대신 취하게 된 그보다 실제적으로 훨씬 없이 살고 있는데.
부모가 없는 고아에게 맞벌이 부모를 가진 이의 깊은 슬픔과 그 아픈 트라우마를 이해하라고 강요하고, 또 고아가 홀로 열심히 만든 것을 뺏은 뒤 "얘, 여기 엄마아빠가 맞벌이를 하고 있는 이 아이가 얼마나 불쌍하니. 너만 갖고 놀지 말고 얘한테도 좀 가지도록 하렴. 그게 민주주의이고 사람사는 도리 아니겠니."라고 하던 이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일까.
머리가 안좋으면 자신을 힘들게 만들지만, 상상력이 안좋으면 타인을 힘들게 만든다. 악은 상상력의 결여가 낳은 것이다. 마음이 섬세하지 못할 때 상상력은 결여된다. 더 없는 이에게서 빼앗아 더 있는 이에게 주게 된다. 그리고는 그것을 평등이자 윤리라고 말하며 자기가 아주 잘 하는 줄 안다. 친절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감격해서 눈물을 흘린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었노라며, 마음에 대해 이제 좀 알겠다고 한다.
아무 것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마음이 아니라 소설을 살았다. 그것도 환상소설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자기가 상상해보지 않고, 남이 쓴 환상을 산 것이다.
그러한 소설들 속에서는 고아, 과부, 병자, 늙은이는 신성한 것으로 예찬된다. 그들에게 신성한 역할이 강제된다. 뺏겨도 성자처럼 웃고 있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아, 과부, 병자, 늙은이에게서 죄책감없이 뺏기 위해 그들은 늘 신성해야 할 의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나는 웃지 않았다. 울고 싶어서 화를 냈다. 사람들은 귀신들린 아이라고 했다.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했다. 숲에서 혼자 정성스레 조각한 목상을 누군가의 액세서리로 뺏기고 싶지 않아 화를 냈을 뿐인데 나는 광인이 되었다.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파괴적인 위험인물이 되었다. 오히려 내가 사람들의 것을 뺏으려고 위협하고 있다는 악으로 불리게 되었다.
내 것을 빼앗은 이와 내 것을 327번째 액세서리 목록에 수집하게 된 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는 그렇게 완벽히 나를 무시했다. 반대로 내가 그들을 존재의 최후까지 무시하려 한다는 말을 퍼트리며, 대문마다 마늘을 걸라고 했고, 마을 입구에는 거울을 세워놓았다. 나는 역병이었고, 숲의 악령이었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았고, 다만 거울에다가 이렇게 썼을 뿐이다.
"나는 여러분의 불우이웃입니다. 여러분의 소설 밖에서 정말로 실존하며, 여러분의 환상이 아니라 여기 거울에 정말로 비치고 있는, 나는 여러분의 살아있는 불우이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만든 불우이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제일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가리기 위해 환상을 만들어낸다. 그럼으로써 제일 보이고 있는 것까지 가려버린다. 사람들은 자신이 제일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환상을 만들어내지만, 그 환상으로 집행하는 것은 또 다른 부당함이다. 누구도 자신이 만든 환상에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환상의 문제다.
숲에서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던 나는 환상의 불우이웃에게 꽃들을 빼앗겼고, 그 결과 내가 불우이웃이 되었다. 한 번도 불우한 적 없던 이들은 불우함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는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한 번도 불우한 적 없던 나를 불우함 속으로 추락시킴으로써 그 만족을 달성했다. 하나의 환상은 반드시 하나의 불우이웃을 낳지만, 환상에 취한 누구도 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윤리적 명령에 따랐을 뿐이고, 인간적이었으며, 모두를 위해 한 일일 뿐이다, 라고 순결함을 주장하는 아이히만의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메아리친다.
그러나 나는 웃지도 않을 것이고, 울지도 않을 것이다. 숲의 악령은 숲으로 돌아가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꽃들 앞에서만 통곡할 것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환상이 없기 때문이다. 꽃의 아름다움은 환상없이 보이는 그대로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책임지고 있는 그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환상도 책임지지 않기에, 자기 자신도 책임지지 못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옛말이다. 아니면 그 또한 주체못할 환상에 취한 말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사람 앞에서 마음놓고 울고 웃을 수 있을 시절도 그리움이다. 이러한 시절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상상력이다. 모든 상상력은 살아있는 것을 상상한다. 더욱 살아있도록 상상한다. 삶이 증진되면 환상이 사라지며, 환상없는 그 자리에서 누구도 불우이웃이 아닐 것이다. 살아있는 이웃의 이 웃음이 가장 눈에 들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