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자유냐"
나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독재와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으면 아리송해진다. 펜이 칼과 싸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적 승리를 점해야 할 정당성이 그 어디에 있는가? 몸이 발달한 이가 든 펜이 칼이고, 몸이 약한 이가 든 칼이 펜일 뿐이다. 칼과 싸우고 싶어하는 펜만이 펜의 우위를 주장한다. 펜으로 끌어오고자 하는 것은 결국 팬이다. 더 많은 팬의 힘으로 펜은 칼에게 승기를 얻으려 한다.
권력에 대한 동일한 추구가 대립하고 있을 때 나는 그 어느 쪽에도 관심이 없다. 그 어느 쪽도 나의 자유를 증진시켜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뿐이다. 민주라는 말이 자유와의 동의어가 아님은 분명하다. 독재의 반대말은 민주가 아니라 자유다. 민주의 반대말도 이런 의미에서는 자유다. 나는 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고, 펜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싶다.
나는 지금 소유로부터 자유롭고 싶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칼도 펜도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가지려고 활약한다. 그들은 나라의 주인이 되어 나라를 갖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는 나라 같은 것은 갖고 싶지 않다. 나는 나를 갖고 싶다. 그러나 나를 가지려면 나를 잊어야 한다. 무엇보다 나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니 나에게는 자유가 중요하다.
어디 아오지탄광에 끌려가보지 않아서 어리석은 말을 한다고 훈계를 들을 때면 나는 더욱 아리송해진다. 보통 민주의 가치를 주장하는 이들이 아오지탄광 같은 것은 어리석은 늙은이들이 만들어낸 망상일 뿐이라고 말들 하지 않았던가. 물론 서대문형무소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다. 나는 그런 곳에 끌려가지 않는다. 나는 자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사실로 노래할 뿐이다.
자유를 주장하지 않으면 자유를 침해받지도 않는다. 자유가 그의 것이 아닌 이가 늘 자유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한다. 그러나 누구도 산소를 호흡할 권리를 그렇게 주장하지는 않는다. 산소가 이미 자기의 것이라서다.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이, 남이 자신의 자유를 뺏었다며 투사가 되곤 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의 자유를 상실시키고 있는 것은 그가 펼치고 있는 투쟁이다. 싸우고 있는 이에게는 가장 자유가 없다.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떠올려보면 무엇인가 조금 더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유태인들은 나치에게 다 뺏겼지만 자유만은 뺏기지 않았다. 누가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가. 그 자신도 수감되었다가 생환한 유태인 정신과의사 빅터 프랭클이 그리 말한다. 가장 비루하던 순간에도 자신에게는 자유만은 있었다고, 나치도 자신에게서 그것만은 도저히 뺏을 수 없었다고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아니 그들은 분명하게 노래했다.
그럼에도 삶에 대해 "예."라고 말하리라고, 수용소에 있던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노래했다. 그들에게는 사실을 사실로 노래할 자유가 있었다. 그 무엇도 인간의 자유를 궁극적으로 뺏을 수는 없으며, 인간은 자유 외에 그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음을 그들은 분명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오직 자유에게만 소유된다는 것, 이 말은 나를 흥분시킨다. 나에게는 그 어떤 소유할 권리가 없다. 소유의 권리는 자유에게만 있을 뿐이다. 자유는 나를 소유하고자 그 권리를 집행한다. 그럼으로써 나를 자유하게 한다. 나에게는 이 사실만이 삶의 희망이다.
사람들이 자유의 권리라고 오해하는 것은 소유의 권리다. 나도 남들만큼이나 그것을 가져야 한다며, 그들은 자신이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가질지를 선택하는 소비자의 행위를 자유의 실현이라고 부른다. 소유가 사람들 자신의 권리인 것처럼 오해될 뿐더러, 소유가 마치 자유인 것처럼 둔갑하기까지 했다. 더 많이 소비할 수 있는 현실을 우리는 자유가 증진된 현실이라고도 믿게 되었다.
소비의 주체로 더 풍족한 소비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이는 지금 자유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자유를 소유하고 싶지 않다. 자유의 주인이고 싶지 않다. 나보다 더 큰 것에 끌려 다니며 그래도 내가 주인인 척 태연하게 식은 땀을 닦아내며 거짓의 미소를 짓고 싶지 않다.
오, 자유여, 부디 나를 소유해다오.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자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자유에 소유되고 싶다. 자유가 나의 주인이기를 소망한다. 자유가 그 환한 뜻으로 나를 이끌어달라고, 오직 그 화창한 빛만 의지해 가겠다고, 나는 빅터 프랭클처럼 노래하고 싶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를 물었던 것은 아주 심원한 통찰이지만,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가 아직 가능하리라 믿었던 시대였다. 그것이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태라고 모두가 궁구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어떤 정치경제적 시스템에도 자유는 존재할 수 없음을 직시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이 무정부주의자였던 것은 결코 아니다. 실존주의는 자기가 어디에도 참여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구는 아나키스트를 가장 싫어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오히려 적당주의자들이다.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모호하고, 어눌하며, 대충대충인 그 감각이 기분좋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자신이 참여되어 있는 현실적 조건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적당히 사회적 역할을 다한다. 세금도 잘 내고, 가끔은 휴대폰요금이 밀려도, 대충 성실하게 사회적 의무를 다한다.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성대한 자유의 축제다. 이것은 그의 존재를 통해서만 펼쳐진다. 그의 주인인 자유가 펼쳐낸다. 자유는 적당적당히 강물처럼 굽이 돌아가며, 싸움에 의해 막히지 않고 더욱 흐름이 지속될 수 있도록 유유히 흘러간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자유는 몰아치며 허공을 향해 존재의 최대치를 우렁차게 펼쳐낸다. 저 폭포수를 보았는가? 아니 보아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다. 물살이 터져나와 더 큰 물줄기에 축제처럼 합류하며 파란 하늘에 선명하게 새기고 있는 저 무지개다. 더욱 거대한 자유의 노래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자유의 종복으로 살고 싶다. 소유냐 자유냐, 그 답이 분명하다. 나는 자유에게 소유되고 싶다. 나를 소유할 것은 자유뿐이다. 나로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