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놀랄 것이다"
내가 만약 자살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다.
이것은 자살이야말로 유일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한 카뮈와 같은 것이 아니다. 카뮈의 고행적 삶에 대한 예찬은 실존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신분석적이다. 유행하는 대극의 유형론들만큼이나 무식하게 인간을 두 유형으로 구분하자면, 나는 정신분석적 인간과 실존주의적 인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은 철학이 되고자 하는 심리학이고, 실존주의는 심리학이 되고자 하는 철학이다. 철학과 심리학[생리학]을 각각 정신과 신체로 유비해보면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이 더욱 분명하다. 정신분석은 자신의 구체적인 신체에서 출발해 그것을 보편적인 정신으로 말하고자 한다. 실존주의는 자신의 구체적인 정신에서 출발해 그것을 보편적인 신체로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정신분석은 몸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실존주의는 몸으로 육화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다.
몸을 떠나고 싶은 이들이 언제나 몸을 고되게 한다. 보편적인 정신의 힘으로 구체적인 신체의 문제를 극복하기를 시도한다. 카뮈와 사르트르 같은 이들은 연대라는 표현을 좋아하는데 그것은 결국 보편적 정신의 다른 이름이다. 이들이 초기에 내세웠던 실존주의적 입장을 버리고 사회주의적 정치론으로 전향한 이유도 어찌보면 당연한데, 정치는 보편적 정신의 구현인 까닭이다. 정신분석과 사회주의는 잘 어울려 다니는 단짝이다. 몸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몸을 떠나고 싶어하는 이들은 철학적 자살을 논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러니 철학적 자살의 문제는 이들에게 맡겨두고 싶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자살은 심리학적 주제다. 키르케고르로 돌아가면 아주 확실하다. 키르케고르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한다. "네 아들을 죽여라." 이것은 직접적으로 자살하라는 말보다 더 심각한 자살의 명령과도 같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고는 정말 엄청 놀랐을 것이다. 이 '놀람'의 상태만큼 심리학적인 것도 없다.
나는 다양한 심리적 상태의 스펙트럼을 놀람의 정도로 말하는 일을 좋아한다. 조금 덜 놀랐을 때 또는 거의 놀라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평온하다."라고 말하고, 조금 더 놀랐을 때 "마음이 불안하다. 두렵다. 흥분된다. 이상하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도 얘기하고 싶다. 놀람은 심리학의 시작과 끝이라고.
자살은 많은 사건들 중에서도 이 놀람을 아주 크게 경험하게 되는 사건이다. 거의 최고치에 가까울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자살자가 생겼을 때 우리는 분명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만 그럴까. 당사자도 놀랐을 것이다. 자신이 차마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될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며, 또 실제로 목숨을 끊는 그 행위를 집행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일상적인 자신과는 다른 아주 새로운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자살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존재가 된 것처럼 생각된다. 너무나 낯설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은 인간을 놀라게 하고 싶어, 무엇보다 자신을 놀라게 하고 싶어 자살을 택하는지 모른다. 지금 이것이 아닌 다른 놀라운 삶을 꿈꾸고, 지금 이 모습이 아닌 다른 놀라운 존재가 되기 위해, 인간은 자살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놀람은 그가 바로 그렇게 되는 일에 성공했다는 그 방증이다. 그는 더는 일상성에 매몰되어 존중감을 잃게 된 퇴락한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 그라는 사람이 대체 누구였을지에 대한 의문을 가득 남기는 낯선 경외감을 회복한 다른 존재다. 그러니 자살은 어느 경우에도 도피가 아니다. 실은 다르게 살고 싶었던 용기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이었는지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그 말을 그에게 더는 건넬 수 없다. 너무나 전하고 싶은데,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자살의 유일한 문제는 이제야 그를 알아본 우리가 그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힘을 가진 그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우리가 그에게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크게 상심하고 좌절해있는 우리 앞에, 그러나 그가 다시 살아서 서있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경험할 것인가?
아브라함은 이 기회를 얻었다. 어디에서나 죽음의 명령밖에는 들려오지 않고, 그것말고는 이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는 것 같아서 결국 죽음의 명령을 집행하려 할 때, 그는 대찬 소리를 듣는다.
"당장 멈춰라! 죽이지 말고 살게 하라!"
아브라함은 두 번째로 깜짝 놀랐고, 첫 번째보다 더욱 크게 놀랐을 것이다. 죽음만이 모든 답인 것 같고, 모든 것이 "죽어라. 죽어라."라고 속삭이며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은 그 절망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라, 라고 명령하고 있는 이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덜덜 떨었을 것이다. 울먹이는 환희로, 또 희망으로.
그렇게 그는 아브라함이었고, 우리는 차마 짐작도 할 수 없는 그 실존주의의 여정을 거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늘 그랬던 것만 같은 익숙한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며, 그의 일상을 현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모든 인간이 이와 같다고 쓰고 있다. 누구나가 당연하게 영위하는 일상은 이 엄청난 과정을 거쳐 돌아온 그 일상이다. 실존주의적 인간이 거의 대다수로 승리하고 있으며, 우리가 두 번 놀란 아브라함과 정말로 같다고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첫 번째는 최대치로 놀랐지만, 두 번째는 최대치를 초월해 놀랐다. 그 순간 우리는 그동안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의 한계를 넘어 지금 현재로의 문을 열어냈고, 놀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인간의 일상은 성공한 초월이다. 나는 진실로 이렇게 쓰고 싶다. 자살이라는 것이 최후의 놀람일 때 그 커다란 놀람보다 더 크게 놀랄 수 있는 일이 언제나 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답이 안보이던 이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아니라, 자살만이 유일한 답처럼 보이던 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초월해 다시 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다. 다시 또 삶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놀라운 일로 되기를 소망한다.
내가 만약 자살한다면 나는 놀랄 것이지만, 가장 큰 용기의 힘으로 다시 돌아와 일상을 살고 있던 우리가, 서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보며 서로에게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그 말을 이제야 전할 수 있는 대화를 함께 나누게 된다면, 나는 그때 가장 크게 놀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