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11

"두려움으로부터의 생환"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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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생활자'라고 쓰다보면 나는 가끔 '마음생환자'라고도 쓰게 된다. 틀린 말이 아니다. 생환한 것이 이제 생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마음에서 생환했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이 생환했다는 뜻이다. 마음은 지옥에서 생환했다. 지옥은 두려운 곳, 두려움으로부터 마음은 생환한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쓰고자 한다. 지옥은 어디에 있는가, 시작은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더 많이 갖지 못한 것을 두려움이라고 여기게끔 학습되어왔다. 이 경우 지옥은 가장 소유하지 못한 상태다. 그렇다면 꽃도, 벌새도, 돌고래도 다 지옥 속에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오히려 지옥은 그 반대편에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지옥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에 있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정직하다. 그의 부모가 상대적으로 덜 관심을 쏟는 것보다, 과잉된 관심을 제공하는 것을 아이들은 분명 괴로움으로 경험한다. 자신의 부모를 두렵게 느끼는 아이들도 부모의 과잉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을 호소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과잉양육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커서는 그 자신도 누군가에게 과잉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에서 하나의 악순환을 본다. 과잉에의 의지가 두려움을 낳고, 그 두려움이 다시 과잉에의 의지를 낳는다.


자신이 조금도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몰개성의 인물이 되면 그 존재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이가 있다. 그의 옷차림과 언행은 요란스러울 것이다. 모두가 고요히 잠든 새벽의 주택가를 일부러 굉음을 내며 바이크로 달려가는 이들도 같은 문제를 공유한다. 두려워하는 이가 두렵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위악을 행한다. 그러니 더 두려워질 상황에 봉착한다. 자신이 머리가 좋다고 믿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는 자꾸만 똑똑한 척을 하기 위해 과장된 거짓말을 일삼다가 결국에는 그 허상이 폭로될 위기로 더 빨리 빠져든다.


그 소재가 개성이든, 힘이든, 지성이든 간에, 두려워하는 이들은 자신이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을 두려움의 이유로 생각하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그 생각이 두려움을 낳는다. 다시 말하지만 지옥은 과잉된 곳이다. 그래서 곧잘 지옥은 뜨거운 장소로 비유된다. 열은 현재 과잉되어 있는 상태를 알린다. 과잉된 것은 열병을 앓는다. 원하는 만큼 갖지 못해서 자신이 지금 춥고 외롭다고 경험하며 욕망의 신기루 사이를 헤맨다.


결핍에 대한 착각이 과잉을 낳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돈, 권위, 애정, 집, 교우관계 등 자신에게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그 결핍을 보상하기 위해 그만큼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에게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직 단 하나만 없는 상태다. 그는 자신을 잃었다.


자기상실자들만이 자기를 잃었다는 이 결핍감에 두려워하며 과잉된 것이 된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더욱 상실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간다. 어떻게 그러한가. 그가 자신을 잃게 된 그 시발점이, 자신 대신에 다른 것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자신인 것처럼 만들려 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이라고 믿으려 하는 이 소재들은 날이 갈수록 덕지덕지 그를 침식해가며, 끝내는 그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완전하게 은폐한다. 그는 껍데기다. 그리고 그 형체를 유지하는 일에만 온정신을 집중해야 할만큼 아주 무겁고 고된 껍데기다.


자기상실자들은 자기가 자기를 배신한 이 첫경험을 끝없이 반복해가며 영구하게 지속해가는 상태에 있다. 우리가 이 상태를 지옥이라고 부르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으며, 이것이 실제적인 지옥이다. 나는 이러한 지옥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바로 입까지 오는 물에 잠겨 있는데 입을 열려고 하면 물이 사라져 물을 마실 수가 없다. 풍요 속의 빈곤은 불감증을 의미한다. 느낄 것들은 많은데 전혀 느끼지 못하는 현실, 나는 이것을 살아도 산 현실이 아니라고 부르고 싶다. 그래서 지옥이다. 차라리 죽는다면 지옥이 아니다.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고통받기에 그것은 지옥이다.


실존적 죄책감이라는 말을 나는 여기에서 떠올린다. 이것은 양심이라고도 불린다. 자신이 자신으로 살지 않을 때, 한사코 그 일을 거부하고 있을 때, 실존적 죄책감은 작동한다. 그래서 두려워진다. 실존적 죄책감을 망각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것을 도덕적 죄책감으로 뒤바꾸려는 수작을 부리곤 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덕적으로 잘못했기에 서로의 삶이 망쳐졌다며 관계를 붙잡고는 자신의 두려움과 그로 인한 분노의 감정을 토로한다. 이 방식도 아주 과잉된 것이다. 과잉된 열기로 두려움을 은폐해보려는 의도다.


문을 은폐하면 나갈 수가 없다. 자신이 자신을 배신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배신한다는 것이며, 곧 자신의 마음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은폐한 마음이 두려움이 된다. 자신이 벽장 안에 숨겨놓고, 마치 벽장 안의 괴물인 것처럼 두려워한다. 실존적 죄책감은 그렇게 은폐된 마음이 실은 자신이 되었어야 할 그 마음이라고 알린다. 가장 자신이었어야 할 그 마음을 지옥 깊은 곳에 유폐시켜 놓았으니 자신을 영영 잃게 된 일은 필연이다. 마음을 은폐하니 자신으로 나갈 수 없던 것이다.


마음은 두려움으로부터 생환한다. 두려움이 있는 그 길을 통해 마음은 생환하며, 또한 두려움이라는 이름에서 원래의 이름을 다시 찾아 마음은 생환한다. 자신이 두려워하는 그것이 바로 가장 자신다운 마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생환의 과정이다. 개성없음이 두려운 이는 개성없음으로 바로 그 자신이 된다. 이러한 이가 개성을 과잉되게 추구하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이 될 수 없으며 영영 두려움 속에 갇히게만 된다.


그러니 나는 이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두려움은 자신을 갖지 못한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자신의 마음을 오히려 숨기려는 과잉의 일을 지속하고 있기에 인간은 더욱 두려워지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도 또 쓸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과 싸우고 있는 그 현실이 바로 지옥이라고. 인간은 오직 스스로에 대해서만 괴물일 뿐이라고. 그리고 괴물은 과잉에의 의지를 결코 굽히지 않기에 괴물인 것이라고.


입까지 차올라있는 물을 마시려면 허리를 숙이면 된다. 자세를 낮추어 문을 개방하는 것이다. 유폐되어 있던 것이 걸어나올 그 문은 더는 지옥의 문이 아니다. 허리를 숙여 맞이한다. 마음이 생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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