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의 시대와 솜털의 시론"
나는 사실 아주 많이 지쳐있다. 누가 이런 나를 위해 아마존의 숲에 가서 소설을 한 편 써주었으면 한다. 그리고는 고집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아다오. 지친 몸에 스밀 것이다. 단비처럼, 또 눈물처럼. 열대우림에서는 한결 쉬울 것이다.
고집이야말로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지상최대의 것이다. 우울도, 혐오도, 무기력도 다 고집의 부산물일 뿐이다. 어디를 가나 고집, 고집, 고집뿐이며, 가만히 있어도 고집이 친히 찾아온다. 굳이 힘들게 와서 하는 말은 언제나 자기 생각이 맞다는 그 말뿐이다. 정말로 그렇다고 칭찬해주거나 최소 동의해주지 않으면 바로 화를 내며 싸움을 건다. 고집은 맛집을 찾아다니는가 싶다. 도장깨기를 하듯이 싸울 맛이 나는 곳을 찾아 사방을 휘젓고 다닌다. 혹은 그렇지 않다면 싸움을 걸고 싶어지게 만든다.
어느 늦은 심야에 고집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다. 해가 떠서 지기까지 온종일 고집에게 2라고 말해진 애달픈 시간과, 최소 여기에서만은 2라는 것을 존중해달라고도 말해진 한숨어린 간청을 모조리 다 무시하며, 고집은 새벽녘의 칠판에 1+1=18이라고 쓰고는 팔짱을 낀 채 만족스럽다는듯이 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 삽화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이것이 실화라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모든 마음이 괜찮다고 외치던 바로 그 현실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런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을 하는 이는 가장 믿지 않는다. 나는 고집의 내용을 구성하는 그 정답과도 같은 자기 생각이라는 것을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맞다고 고집하는 이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을 부린다. 실은 알지도 못하니까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배우지도 않는다. 자기는 그래도 다른 이보다는 그 분야에 대해 더 아는 권위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들에게 색칠한 병아리를 팔던 이가, 시집을 내려는 이에게 고개를 젓는다. 장사의 기본이 안되었다며, 이해가지 않는 시어를 다 친절한 게임메뉴얼처럼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먼저 이 시를 수학공식처럼 쉽게 이해시켜야 사람들에게도 팔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시는 색칠한 병아리의 운명에 처한다.
고집은 시를 죽이고자 한다. 시를 죽이려는 것은 언제나 잘 알지도 못하는 고집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고집이다. 이러한 고집은 넝쿨을 닮아 있다. 산만하게 뻗어 기괴하게 연결된 기계의 회로도를 닮아 있으며, 복잡한 프로그램의 알고리즘을 닮아 있다. 뇌의 주름을 닮은 SNS의 관계지형도라고도 나는 말하고 싶다.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기 위해 이것들은 더욱더 집적된다.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무수한 언어들로 기필코 숨겨야 하기 때문이다.
숨겨지는 것은 삶이다. 시는 삶을 개방하려 하나, 고집은 시를 죽이고자 함으로써 결국 삶을 은폐한다. 삶이 은폐된 징후는 깔끔하고 점잖으며 친절한 형식에 집착하는 것이다. 아르마니 정장을 입고 그 손에는 튤립 한 송이를 든 채 초등학생들 앞에 젠틀하게 서있는 병아리 장수처럼. 나는 여기에서 가장 거칠고 투박한 것이 가장 미학적으로 완결된 척하는 기만을 본다. 나도 로캉탱처럼 구토한다.
토해지는 것은 내가 알지도 못하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양손으로 그러모아 들이민다. 이것도 설명해보라고, 모든 것을 프로그램 법칙처럼 아는 척하듯이 이것에 대해서도 다 아는 척해보라고, 그 얼굴에 더욱 토하고 싶다. 시를. 나는 시를 토하고 싶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것을 드러내고 싶다. 고집의 넝쿨로 봉쇄되어 더는 갈 수 없게 된 그 저녁 무렵의 강둑의 길을 개방하고 싶다. 우리가 함께 걷던. 넝쿨에 막혀 더는 만날 수 없게 된 우리 사이를 개방하고 싶다.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나를 가장 지치게 한다.
삶은 언제나 우리 사이며, 시는 우리 사이에 난 산책로다. 고집은 그 길을 끊고 삶을 봉쇄한 뒤, 당신과 나를 합쳐서 십팔이라고 말한다.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고집을 설득했다. 우리는 둘이고, 둘 사이에서만 삶은 펼쳐진다고 말해왔다. 고집은 우리는 십팔이라고만 반복했다. 시대가 그 목소리로 젖어갔다. 우리는 다 십팔이었다. 고집의 시대가 주저앉아 다 십팔이라고만 망령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지쳐간 것이다. 색칠된 병아리가 떠나간 그날 밤의 아이 앞에서.
알 수 없는 일을 울 수 없는 것이 고집이 된다. 눈물이 몹시 커서 울지 않으려고 최대의 고집을 부린다. 큰 울음은 울 수 없다. 그것은 토해져야 하는 것이다. 시로서.
시는 알 수 없는 것 앞에서 가장 크게 토해진 울음이다. 시는 눈물로 길을 내어 우리는 알 수 없던 것과 다시 연결짓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떠나간 것과 닿고 있는 이것이 마음이라고 이제 알게 된다.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다.
봐라. 당신에게서 떠나간 것을 이제 우리 둘이 함께 보고 있지 않은가. 뽀송한 그 솜털이 행군한다. 그 작은 몸짓 하나로도 사랑스러움이라는 승리를 반드시 쟁취해온다. 개선장군처럼 뽐내듯이 걸으며 관객들의 가슴을 영원한 행복과 온기의 약속으로 가득 채운다. 더 가까이, 자꾸자꾸 만지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님이 오신다는 그 날을 설레이며 닳도록 넘겨보는 달력처럼. 가슴이 이 작은 솜털 하나만으로도 꽉 찬다. 내 전부. 사랑에는 질량이 있었다. 사랑을 처음 시작한 날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봐라. 그 질량만큼이었던 것이다. 눈물의 크기는. 알 수 없는 것을 다만 사랑했던 그 생생한 크기는. 이처럼 우리 둘이 함께 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 지금 뽀송한 솜털이 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그 온기와, 그 미소가 지금도.
고집이 끝내 죽이지 못한 것은 시다. 그것은 또 살아난다. 마음이 있어서. 마음 안에 눈물이 있고, 그 눈물 안에 사랑이 있어서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울지 못한 고집은 무수한 넝쿨을 자라게 한다. 그러나 넝쿨도 눈물을 닮아 있다. 주룩주룩 사정없이 흐르고만 싶어 뻗어댄다.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이는 아마도 자기가 울어도 되냐고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트워크는 울지 못한 눈물의 수로다. 메마른 수로만이 사방으로 연결되고 복잡해져만 간다. 누가 차라리 열대우림을 가져올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나는 정답과도 같은 그 자기 생각이라는 것을 결코 믿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눈물을 봉쇄할 수 없을 것이다. 시가 흐를 것이고, 솜털들이 개선할 것이다. 넘치도록 자꾸자꾸 돌아올 것이다.
시는 솜털들과의 약속이다. 내가 믿는 것은 이 약속이다.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하고 싶지 않다. 테르툴리아누스처럼, 알지도 못하니까 나는 믿는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한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이다. 넝쿨 속으로. 고집의 시대 속으로 또. 나는 대체 언제 지쳤던가? 그런 적이 없다. 믿음은 언제나 삶의 문제다. 또 한 걸음, 알 수 없는 것을 살아서 쓰인 것이 시다.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보고 싶은 솜털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