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가는 길"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 눈이 아주 깊고 맑았으며, 고요했고, 상냥했다. 함께 나누던 어떤 말에도 온기가 감돌았다. 내가 그를 그렇게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모습이었다.
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역정을 내고, 주먹으로 쿵쿵 바닥을 치며, 큰소리로 화를 낼 때도, 나는 그를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모습이었다.
정말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 어떤 표현을 통해서라도 그 진실된 눈빛 속에 담긴 아주 본질적인 따뜻함을 반드시 전하고 있었다. 무엇도 그 눈빛을 가릴 수는 없었으며, 무엇으로도 그는 나를 마주하며 그 빛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사람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내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나는 사랑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신비한 것이다. 그렇기에 무척 생소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환상들이 너무나 많아서다. 그 환상들을 지속하기 위해 고집이 만들어진다. 고집은 자기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고집하지만, 실은 그것은 고집을 지키기 위한 고집이다. 사랑은 이미 거기에 있지도 않다.
사랑을 잃게 된 불행은 자기에게 맞는 대상을 찾는 일이 사랑이라고 생각해버린 착각에서 비롯되었으리라. 사랑은 이로써 관계의 윤리학으로 몰락해버렸다. 상대를 자기에게 맞추거나, 자기를 상대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일은 사랑의 의무처럼 규정되었다. 그러다가 지친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맞추는 억압적 행위를 멈추고 서로의 취향을 인정함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와 평등을 함께 실현해가는 일이 사랑이라고도 말하게 되었다. 사랑은 이제 정치학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랑"이 사랑의 프로파간다가 되었다.
짝짓기와, 윤리와, 정치학이 사랑을 대신해버린 자리에 우리는 서있다. 그것들의 공통점은 대상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랑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대상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것이 사랑의 몰락이다. 절대적이어야 할 사랑이 대상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다. 대상이 가장 중요한 것처럼 사랑의 자리를 꿰어찬 그 자리에서 사랑은 이미 거기에 있지도 않다.
사랑에 대한 환상의 핵심적인 내용 또한 이것일 것이다. 대상의 질에 따라 사랑의 질이 결정된다고 하는 생각이다. 어떠한 대상과는 오히려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만을 맺게 될 뿐이나, 자기와 조금 더 잘 맞는 대상과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통속적인 이해는 여기에서 출현한다. 이 대상적 관계의 주도권을 자기 자신에게로 수렴시키는 경우도 있다. 자기가 심리적으로 불건강할 때는 폭력적인 사랑의 대상을 만나게 되지만, 자기가 심리적으로 건강해지면 진정한 사랑의 대상을 찾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마치 대상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질적 수준에 따라 사랑이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이것도 대상에 경도되어 있는 생각이다. 그 수준이 평가될 자기 자신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대상인 까닭이다.
나만 잘하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상대가 잘하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서로가 잘하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생각, 이 3가지의 생각은 전부 다 사랑의 성립에 있어 대상을 고집하고 있는 생각들일 뿐이다.
나는 지금 사랑은 대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대상과도 아무 관련이 없다. 사랑은 오직 그러한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과만 연관된다. 그렇다면 상대를 위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 사랑인가? 나는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위해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을 버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양극성이 그러하듯이 거짓의 구조로 만들어진 양극성이다. 마치 이 양극 사이에서 사람들은 고민하는 척을 한다. 상대를 위해 얼마만큼의 내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지, 또 얼마만큼의 내 자신을 그럼에도 지켜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숙고한다.
대상이라는 개념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다만 시간을 벌려고만 만들어낸 가짜 고민이다.
자기 자신이라는 정체성은 직접 포기할 수 없다. 정체성을 만들어낸 그 대상을 포기할 때야 자연스레 함께 포기되는 성질의 것이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라는 이 말은 얼마나 낯선가? 참으로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진실이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혼자 있지 않으려고 자기가 사랑하고 또 사랑받아야 한다는 환상적 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실체적 대상들을 분주하게 찾아다닌다. 또는 확성기를 들고 그러한 대상들을 큰 목소리로 찾아 부른다. 그렇게 대상들을 찾아다니거나 대상들을 끌어오려는 효과적인 형상으로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다시 한 번 묘사해보자면 이러하다. 혼자인 것이 두려운 이가 환상소설을 쓴다. 그 소설 속에서는 자기가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이 설정되며, 또 그 연인에게 어울릴 작가 자신의 모습 또한 오너캐로서 설정된다. 그리고 작가 자신은 이제 그러한 오너캐의 설정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아 현실로 구현하고자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가상의 연인에 대해 가상의 사랑을 하는 가상의 주인공은 이러한 방식으로 출현해, 실제의 사랑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내가 흥미롭게 느끼는 것은, 이러한 소설적 작법의 차원에서도 사랑은 혼자 하고 있던 것이라는 점이다. 대상이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다양한 연극들을 펼쳐내지만, 실은 다 혼자만의 시나리오 속에서 연출해내고 있는 것이다. 대상의 필요성은 배역을 맡아줄 이가 있어야 연극을 성립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 이 모든 것을 조금 더 분명해지게 하고 있는가. 나는 비로소 연극이 끝난 자리에서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고집은 연극을 지속하고자 하는 고집이다. 나쁜 대상과는 연극을 하게 되고, 좋은 대상과는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잘 맞는 좋은 대상이라는 것은 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편하고 만만한 대상이다. 그러니 자기의 연극에 동참시키기에 한결 수월하다. 물론 상대도 이쪽에 대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 결과는 서로가 만만한 대상을 만나 각자가 집필한 연극의 배역이 되어주며 적당한 타협과 조율을 통해 함께 연극활동을 펼쳐가는 현실이다. 그러니 반드시 권태와 소진이 찾아온다. 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흥미와 자극을 제공해줄 새로운 시나리오들이 계속 집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조금도 신비하지 않다. 구태의연하고 지루하다. 이것은 어떤 반복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나에게 어떠한 부모역할도 한 적이 없다. 나도 그에게 부모역할을 한 적이 없다.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이었고 부족함이 없었다. 돈도 없고, 집도 없고, 학벌이나 직위 등 유용한 사회적 자원은 그 무엇 하나 갖지 못했지만, 그의 존재는 언제나 충만했다. 그는 다만 존재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존재에 그 자신을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던 내 모습이었다.
부모가 없이 혼자가 되는 것이 두려운 이들은 부모라는 대상을 어떻게든 자기 옆에 붙잡아두기 위해 여러 조작적 시나리오들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물리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부모와 멀어지게 되면 이들은 대신 자기에게 부모역할을 해줄 대상을 빠르게 수배한다. 자신의 행위를 통제하지는 않으면서, 자기가 하는 그 모든 일마다 무조건 허용해주고 칭찬해줄 환상의 역할을 떠맡긴다. 공정하게 자기도 상대에게 그렇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자기가 바라는 부모상의 모습을 소설로 써낸 뒤 그것을 서로에게 수행하는 연극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사랑이라고 붙인다.
대상에 대한 고집은 결국 부모에 대한 고집이다. 모든 대상은 실은 부모의 반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일 수는 없는 것이, 생물학적 부모는 결국 자신에게 분명 어떤 순간은 충분히 우호적이었던 남자와 여자, 즉 모든 인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에게 우호적이기를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곧 대상에 대한 고집인 것이다.
이것과 완전히 다르게 사는 방식, 대상적으로 살지 않는 방식은, 혼자로서 사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이것은 일견 외롭고 불행하게 보이지만, 내가 혼자로서 산다고 말할 때는 언제나 혼자로서 모든 인간을 산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떠한 일이 생겨나는가. 모든 인간이 자기에게 우호적이기를 고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고집을 어떻게든 실현하기 위해 늘 환상의 연극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내 자신이 모든 인간에게 우호적으로 살게 된다. 당연하다. 혼자인 나는 모든 인간으로서 혼자인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만든 요리는 모든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우호의 증표다.
대상을 통해 사랑이라는 것이 실현된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대상과의 사랑 속에서 자신이 자유로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대상의 우호적인 시선 속에서 늘 존중받으며, 자신감이 넘치고,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대상이 사랑의 힘을 통해 자신에게 자유를 허용해주어야 한다고 믿는 발상이다. 즉,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상의 허가가 필요한 구조다. 엄마가 따듯하게 지켜보는 중에만 아이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소설의 통속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사랑이 대상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 속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 허가하거나 금지하는 이가 없다. 허가나 금지의 명령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런 것은 없었다. 우리는 원래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 자유를 이제 묶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무엇이나 하지 않겠다고, 다만 이것만을 하겠다고 우리가 반한 것에 스스로의 자유를 묶는다. 그러면 그것이 사랑이다.
서로 대등해야만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랑의 정치학의 변을 나는 좀처럼 믿지 않는다. 사랑은 만만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더 큰 것을 향해서만 흐른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두려운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두려움에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은 더 큰 것 앞에서 대상이 포기되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정체성이 포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바로 그것을 포기하겠다고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숲을 향하는 일과 같다. 한 걸음, 한 걸음, 숲의 신비 속으로 인간은 걸어 들어간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것의 예감에, 그 예감이 전해주는 이 반함의 느낌에 끌려 인간은 깊고 맑게 또 고요하게 나아간다. 그리고 언제인가 그 거대한 것이 전하는 아주 따듯하고 상냥한 온기를 가까이에서 문득 실감하게 될 때 인간은 말하게 된다. 그것은 내 모습이었다고.
나는 나보다 큰 것에 내 자신을 묶어 그것만을 따랐고, 그것은 처음부터 나였다. 나는 나를 따르고 있던 것이다. 나로 살고 있던 것이다. 나는 사랑으로 가는 길의 이름. 하나이자 모든 인간의 이름이었다. 어린왕자가 옳다. 나라는 이 특별한 이름을 찾는 일이 사랑이었다. 나에 길들여져 나로서 무르익는 일이 사랑이었다. 이것이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