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생활자의 수기 #34

"항복한 행복"

by 깨닫는마음씨




내가 '행복한 항복'이라고 적지 않고 '항복한 행복'이라고 적는 이유는 분명하다. 항복이 행복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묘사하고 싶지 않아서다. 내가 '모름'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모르면 알게 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이제 모름을 앎에 대한 수단으로 삼는다. 앎에 고착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 모름을 말한 일이 오히려 더욱 앎을 지지하고 강조하기 위한 기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항복에 방점을 찍고자 한다. 실상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과다. 쾌락이라는 자극은 추구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어느 한순간 "와, 나 지금 태어나있어서 너무 좋다."라는 느낌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이것은 도취된 자극의 감각이 아니라, 오히려 온기 속에 녹아 딱딱한 것이 허물어지는 감각이다. 그리고 나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은 항복의 감각이라고.


나는 내가 키우는 7마리의 고양이들에게 일찌감치 항복했다. 넉넉치 않은 벌이로 10여 년간을 고양이들과 함께해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스스로 제한했다. 늘 편한 아지트처럼 사람들이 찾아오던 연회의 시간들은 끝이 났고, 반대로 나 또한 여행을 가거나 장시간 집을 비우는 일을 끝맺었다. 고양이들이 충분히 공간을 얻을 수 있도록 등골에 중력를 더하는 월세집을 구했고, 내부도 고양이들을 중심으로 꾸몄다. 냉장고를 사기보다는 조금 멋진 캣타워를 사고, 편리한 가전제품 대신에 차라리 캣폴들을 더 사서 나무다리로 연결했다. 평범하게 사람사는 집 같지 않다. 고양이들이 주인인 집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묘사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나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다시 태어나도 이럴 것이다. 이것은 마치 순수하게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과도 유사할 것이다. 다 주고 싶다, 분명 그런 마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항복이다.


항복은 다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항복이라는 단어를 승패와 관련된 부정적 의미로 생각해보아도 아바가 노래한 것처럼 "The winner takes it all."이다. 다 뺏기는 것이지만, 자발적인 항복의 의미에서는 다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을 드린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항복의 심오한 차원이다. 피동적으로 어떠한 위력에 의해 항복된 경우에는 다 뺏기는 것 같아도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뺏기지 않는다. 그것은 억지로 뺏을 수 없다. 그러니 누군가를 강제로 항복시킨 이는 실제로는 항복시킨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다 얻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항복될 수 없다는 말은 그래서 사실 중의 사실이다. 항복은 오직 자발적인 항복일 경우에만 그 의미가 성립된다. 자발적으로 항복할 때 인간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자신이 항복한 것에게 드리게 된다. 바로 자신의 마음을 드리게 된다.


"저를 다 드립니다." 이 표현은 "제 마음을 다 드릴게요."라는 의미다. 항복의 정확한 의미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드리겠다는 것, 그만큼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이토록 소중한 그것의 사람이 되겠다는 것, 이것이 항복인 것이다.


그래서 항복은 행복한 것이다. 원하던 것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언제나 자유일 뿐이라고 내내 과감하게 말해왔다. 그런데 항복은 엄청난 자유의 표현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그것의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항복은, 자신을 그것에 스스로 묶는 일과도 같다. 스스로를 임의로 제한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크게 제한할 만큼의 바로 그 자유를 나는 이미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자유를 갖고 있는 이만이 그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도 있다. 항복은 내 자신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자기표현인 것이다. 그러니 자발적으로 항복하는 이는 자유를 뺏기는 것이 아니라, 결코 뺏길 수 없는 자신의 거대한 자유를 영원히 얻게 되는 것과도 같다. 가장 원하던 것을 분명하게 이룬 것이다. 행복조건이 최대치로 달성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복한 행복이다. 우리말은 언제나 옳다. '항복한 행복'은 행복이 항복했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항복한 결과로 행복이 찾아왔다는 뜻이며, 또 우리가 자유라고 하는 진짜 행복에 항복했다는 뜻이다. 서구의 영성전통들에서는 'surrender'라고 묘사하고, 불교에서는 '귀의한다'라고 묘사하는 그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다들 자유롭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소망들로 세워진 전통들이다.


이처럼 항복은 자유의 문제와 직결된다. 항복이 자유의 수단이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항복은 자유의 표현이라고 다시 한 번 쓸 것이다. 항복함으로써 자유는 스스로가 이미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자유는 숲속의 고양이들이 자기의 자유를 구속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도무지 그렇게 여길 수가 없다. 오히려 이렇게 말하리라. 자신의 자유로 고양이들을 사랑할 이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내 마음을 다 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자신의 자유로 선택해놓고 자신은 그것에 속박되어 자유롭지 못하고 불행한 존재라고 말하는 일은 그 어찌나 비극인가. 또 그 어찌도 희극인가. 그러나 이것은 과정일 뿐이다. 사랑을 배워가는 길의 도중은 이 희비극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사랑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모든 희비극에의 도취는 부드럽게 허물어진다.


나는 아직 모든 것을 그 온기로 허무는 사랑이 항복의 다른 이름이라고 쓰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이만이 항복한다. 사랑을 배우고 싶어하는 이들의 정규과정이 또한 항복이다. 커다란 자유가 그만큼이나 커다랗게 소중한 것에게 스스로를 부드러운 온기로 묶는 활동이 사랑이며, 그것이 곧 항복의 의미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사랑한 행복'이라는 표현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삶이라는 것이 통째로 그러했다. 내 마음을 다 드려 사랑할 수 있었던 행복이었다. 평범하게 사람사는 일 같지 않다. 거기에는 사랑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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