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째 날"
처마라고 해야 할까. 외부평상 위에 썬라이트를 올려 지붕을 만들었다.
사람이 무엇보다 친해야 할 것은 하늘일 것이다. 화창한 날 파란 하늘을 보며 걷기만 해도 우울감은 많이 사라진다. 아무 의학적 내지 심리학적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하늘을 자주 친밀하게 접하는 이는 하늘의 크기만큼 그 자신의 마음의 크기를 회복하게 되리라고.
나는 또 사람은 하늘과 친해지기 위해 지붕을 만들었다고도 생각한다.
따가운 햇살 아래서도 또 차가운 눈비 속에서도 하늘을 더 오래 그 눈에 담아두고 싶어, 하늘과 더 많이 함께 있고 싶어 사람이 지붕을 만든 것이었으면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아주 좋아할 것이다. 그리운 연인을 만나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을.
사람, 그래 사람은 결국 하늘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지 않을까. 사람이 하늘로 돌아간다고 믿는 유형과, 사람이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유형이다. 나는 전자다. 사람이 푸른 하늘의 자유를 그리는 것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라고 믿는다.
사랑했던 것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꿈, 하늘은 그 꿈으로 가득 차있다.
작은 언덕을 올라가 녹색 철문을 밀고 들어가면,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빠도, 엄마도, 흰둥이도, 똘똘이도,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잘 놀다 왔냐며 그 웃음들이 환할 것이다. 고양이들, 어쩌면 나는 이제 고양이들을 기다릴 것이고, 어쩌면 마루로 올라가 이미 끌어안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시 만나자는 약속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의 실현이었다.
나는 하늘과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감수성이 꽃피어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눈빛도 하늘을 닮았다. 눈동자 깊은 곳에는 약속의 정감이 가득하다. 사람이 그러한 존재이기에,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 미치도록 좋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나누고 싶어하는 유일한 것은 이 감수성이다. 2500년 전에는 꽃 한 송이를 들고 미소를 지으면 직접 전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언어가 너무 많다. 언어로는 직접 전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기죽지 않는다. 2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파란 하늘은 변함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임종을 앞둔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가 너무 힘들다는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람은 원래 잘 변하지 않는다고 그의 아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덧붙였다는 말을 들었다.
"근데 그거 아니? 하나님도 변하지 않으신단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이 또한 하늘의 감수성이라는 것을 바로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든 우리가 하늘 아래 함께 앉아 있게 된다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여기는 그러고 싶은 공간이다.
나는 언어가 지붕을 닮았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하늘을 직접 전하지는 못하고 가리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하늘과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이 분명히 담겨 있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한 하이데거는 옳다. 나는 괜히 이렇게 말해보리라. "언어는 존재의 지붕이다."
하늘을 향해 열린 지붕 아래에서 우리는 대화를 할 것이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또 다시 만나자고. 꼭 약속이라고.
하늘이 지키고 있었다. 열두째 날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