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반복"
까르마와 같은 개념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철학이나 심리학 같은 다양한 학문분과는 반복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심리상담의 이론들은 아예 무엇이 어떻게 그리고 왜 반복되는지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사실 반복을 말하는 일 자체가 새삼스럽다. 반복이 있어야 법칙이라는 것이 확보될 수 있다. 인간이 쌓아온 모든 문명은 반복에 근거하여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길게 쓰려면 길게 쓸 수 있는 것에 대해 나는 굳이 짧게 쓰고자 한다. 반복의 양상에 대해서보다는 반복의 의미에 대해 새롭게 환기시켜보려는 일은 짧으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반복은 미완의 사랑이다, 나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다.
아주 흔하게는 지배적인 아버지에게 시달려온 이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배적인 인물이 되는 식으로 반복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아버지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반복되는 것은 구조 자체다. 그는 동시에 지배되는 자식이 되는 형태로도 반복을 구성한다. 누군가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는 이는 동시에 자식이며, 바로 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구조가 반복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지배적인 아버지를 반복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의 지배 속에 담겨 있던 어떤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또 피지배되는 자식을 반복함으로써 그는 피지배되는 양상 속에 담겨 있던 어떤 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마음들이 다 온전하고 선한 마음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는지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알고 싶기에 반복은 반복된다. 이것은 그녀와 거닐던 번화가와, 카페와, 그 골목 끝의 이층집을 반복해서 찾는 모습과도 같다. 나는 이것이 무한한 짝사랑의 과정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짝사랑은 언제나 무한의 고리 속에 있다. 반복은 멈추는 법이 없으며, 여전히 사랑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기분 속에 있다.
그러나 짝사랑의 기분 속에만 잠겨있는 것과 사랑의 과정을 계속 나아가는 것은 조금 다르지 않겠는가.
결국에는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쓰고 싶다. 사랑은 이해함으로써 이해받는 것이다. 그 기회를 얻고자 반복은 작동한다.
자신에게 지금 일어나는 일은 자신이 했던 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부모에게 미운 감정을 가졌던 이는 필연적으로 부모같은 입장이 되어 이제 그 미움을 자신이 받게 된다. 미움받고 있는 그에게는 할 말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필사적으로 호소하고 싶을 것이다. 가슴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다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그때 그는 이해하게 된다. 그의 부모가 지금의 그와 같았음을. 부모도 무척 억울했고, 정말로 자신이 생각하던 그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같은 것을 경험하기 위해 반복은 작동한다. 그럼으로써 정말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손길에, 지금의 내 마음이 동시에 이해받는다. 나는 이것이 사랑이 완성된 순간이라고 말하리라. 원이 완성되었고, 이제 사라진다. 함께 자유롭다. 까르마는 정화되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해치워야 할 숙제 같은 것으로 까르마를 대하기보다는, 차라리 사랑을 완성할 기회라고 까르마를 보는 일은 좋을 것이다. 아직 미완성일 뿐이지 그것이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오랜 반복이 멈추어지고 그 반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자유라고 한다면, 자유는 법칙을 깨는 것이다. 이래야 한다는 절대적인 법칙은 없다. 무엇으로도 가능하다. 이것을 사랑의 무조건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결국에는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반복되지 않기 위해 반복하고, 완성하기 위해 미완의 여정 속에 있다. 나는 시작부터 그 끝까지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어떤 반복도 그러했다. 이해하고자 하면 끝이 있었고, 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