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없던 상담소를 만들어보자 #33

"서른셋째 날"

by 깨닫는마음씨


ak.jpg?type=w1600



마음의 방주가 뭘 하는 곳이냐는 질문에 대해, 편히 쉬면서 만화책을 보고 마음얘기를 나누는 곳이라고 대답하면 거의 정확하다. 어떻든 형식은 심리상담소가 부설된 북카페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심층적인 의미를 드러내보기 위해 방주(ark)라는 표현을 재구성하고 싶다.


처음에는 Accepting, Responding, Keeping으로 생각해보았다. 수용하고, 성실하게 응답하고, 지켜간다는 의미는 무척 좋다. 그러나 동시에 왠지 심리상담이라는 활동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기분이 든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해요."라는 양육과잉의 목소리에 일조할 것만 같다.


부모가 성인군자처럼 잘해야 아이가 건강하고, 또 마음이 온전하다는 식의, 오늘날 곧잘 폭력적으로 행사되곤 하는 하나의 관점에 대해 나는 심리상담사로 살아온 16년의 시간 동안 동의한 적이 없다. 정신역동적 애착이론의 관점에 입각한 슈퍼바이저를 만날 때면 늘 서로가 곤욕이었다.


마음을 아이처럼 상정한 뒤 마치 토라진 아이를 어르듯이 소외된 마음들을 알아주어야 한다며 극성맞게 유사모성을 발휘하려는 이들은 왜 유치원에 취직해 그 적성과 재능을 아낌없이 뽐내지 않는 것인가. 심리상담사처럼 행세하는 일이 유치원교사가 되는 일보다 더 쉽고 만만해 보여서인가?


결국 나는 이러한 일들을 언급할 때면 비판적인 어조로 바뀌는 것을 숨길 수가 없다. 한 개인이 어떤 것을 비판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그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에게 최고를 해주어야 한다며 생겨난 부모 자신의 죄책감과, 그 죄책감을 이용해 장사하는 무리들에게 아주 질려버렸다. 그 고집이 너무 힘들다. 죄책감도 고집 때문에 생기고, 죄책감 장사도 고집으로 지속된다.


부모를 신으로 꿈꾼 이들이 커서 자기의 아이에게 신이 되려고 한다. 아이가 없으면 마음이라는 것을 아이로 삼아 신의 행세를 하려 한다. 모든 고집의 정체는 결국 자기가 신이어야 한다는 그 고집이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처럼 하고 있을 때는 아주 막대한 힘이 들 것이다. 한 사람이 힘들면 모두가 힘들다. 사회 전체가 힘들다. 사회에 속해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베짱이인 나도 힘들다. 특히나 상담이라는 활동 자체가 힘들어진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미움받을 용기』가 유행하던 시절이 어쩌면 당분간은 심리학적 다양성의 마지막 전성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무엇을 잃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라면 실존심리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모험심. 또 다른 말로는 경외감.


바로 내적 깊이를 향한.


역시 난 락음악을 좋아하는 꼰대일 뿐이다. 얕은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얕은 것을 깊은 진리인 것처럼 말하는 일에 반항심이 생긴다.


나는 이런 사람이에요. 또 이런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이기도 하고요. 무슨 좌판을 펼쳐놓듯이 평면적인 특성들을 나열해가며 자기를 게임캐릭터처럼 설정하는 놀이에는 어떠한 신적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 자기완결적이며, 심하게는 자폐적이다. 이것은 깊은 것이 아니라 깁은 것이다. 덕지덕지 좋은 것들만을 모아 최고의 자신을 만든다는 프랑켄슈타인의 생각이며, 곧 자기를 신으로 꿈꾸고 있는 상태다.


이러한 이들은 상담소에 찾아와 모든 것이 가능한 최고의 부품을 달라고 곧잘 청하곤 한다. 이 마음도 온전하고 저 마음도 온전하니 그 두 개를 동시에 다 이룰 수 있는 마법적 솔루션을 원한다.


그렇지 않고 상담에서 다루는 일은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한 개인의 내적 깊이는 포기에서 생겨난다. 포기를 통해서만 선택과 집중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양성이라는 표현은 실은 깊이라고 하는 질적 차원에 대한 얘기다. 그냥 표면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이 질적으로 다른 것이 다양성이다. 표현 그대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종의 완벽성에 대한 망상을 포기하고, 그는 정말로 고유한 자신만의 삶을 산 것이다.


부모, 포기를 돕는 것이 정확하게는 부모의 임무다. 자신이 신이기를 먼저 포기함으로써 이 임무는 달성된다. 부모의 심대한 착각은 무엇일까. 자기들 빼고는 근본적으로 다 나쁜 놈들로 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부모들은 언제나 음모론 속에서 살아간다. 자기들만 이 위험한 악마들의 세상에서 아이를 지켜낼 수 있다는 판타지소설을 실제의 삶 대신에 산다.


그런 것은 모험이 아니다. 투쟁이다. 사실적인 모험에는 마왕이 없으며, 적이 없다. 자신의 내적 보물들을 발견해가는 오롯한 혼자만의 여행일 따름이다.


아주 의미있는 점은, 이렇게 내적 깊이를 향한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는 이일수록, 외적인 방향성에서는 타자를 향해 점점 근접해가게 된다는 것이다.


내적인 성숙도와 인류애의 각성도는 정확하게 비례한다.


당연하다. 이것은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배움은 인간인 자기 자신과 인간인 타자들에게 동시에 적용된다. 내로남불의 분열이 없으며 심리적으로 건강하다.


사실 모든 사람은 신이 되려고만 하지 않으면 다들 심리적으로 이미 건강하다. 어떠한 형태로든 신을 꿈꾸기에 분열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내적 깊이를 향한다는 말을 분열없는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는 말로 쉽게 바꾸어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a부터 시작한다. awakening이다. 신의 꿈을 꾸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r로 이어진다. running이다. 잠에서 깨어 너에게로 달려간다. 마침내는 k의 순간이다. knocking이다. 벅찬 숨을 고른 뒤 설레는 가슴으로 너의 문을 두드린다. 이제야 너를 기억해내 찾아왔다며, 아주 많이 보고 싶었다고.


나는 지금 내적인 마음을 향하는 모험의 여정과 외적인 타자를 향하는 모험의 여정을 동시에 묘사하고 있다. 그 둘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결국 재구성해본 방주(ark)의 의미다.


방주는 물론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지키기만을 위해 지키고 있었을까? 그것은 동물원의 사육이다.


차라리 나는 우편배달부를 생각해본다. 소년이 소녀에게 마음을 담아 쓴 편지를 우편배달부는 지키며 이동해간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 그 마음을 배달한다. 문을 두드린다. 마땅히 당도해야 할 것이 잘 지켜져서 이제 도착했음을 알리는 그 반가운 소리가 들려온다.


무엇인가를 지켜야 한다면 왜 지켜야 하는가?


그 삶을 미래로 전하기 위해서다.


마음을 너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일을 하는 이들을 나는 이제 이렇게 부르고 싶다.


life authenticator.


무엇보다 먼저 심리상담사들을 이 표현으로 부르고 싶다. 이곳에서 일하는 상담사들의 명함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리상담사에 대한 호칭만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만나고자, 또 타자를 만나고자 방주처럼 여행해가는 삶의 모험가들을 위한 모든 이름이다.


신이 아니고 인간이었던 그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허투루 흘러가지 않았다고, 반드시 닿았다며, 타자의 삶을 진실하게 공언하고자 하는 어떤 선량한 마음의 우편배달부들에게 전하고 싶은 그 이름이다.


서른셋째 날, 나무 위에는 그렇게 써보았다.




la.jpg?type=w1600


작가의 이전글세상에 없던 상담소를 만들어보자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