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넷째 날"
어떻든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제목만을 빌려온 원작소설을 딱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는 분명 윤리적 의도를 함축하는 물음이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윤리적 계몽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일에는 나는 큰 관심이 없다. 차라리 내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망량의 상자』에서의 교고쿠도의 말이다.
"행복해지는 건 간단하다네. 인간을 그만두면 되는 걸세."
이 말을 들은 작중의 인물 세키구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행복에서 가장 먼 것은 바로 자네다. 그리고 나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어떻게?'에 대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는 지금부터 윤리시간입니다』는 정말 좋은 만화다. 청소년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고민들을 장그래만큼이나 진지충인 윤리선생이 철학적 성찰을 통해 함께 다루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아주 재미있지만 두 번 읽게 되지는 않는다. 계몽적이라서다.
이보다는 나는 『불가사의한 소년』이 '어떻게?'를 향한 대답에 더욱 근접해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정말 더럽고 추하며 하찮은 생명체로 보는 신적인 존재가 그럼에도 인간에게 끌려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인간을 알아가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다운 어떤 모습을 능동적인 자아상으로 채택해서 그에 맞는 언행들을 실천해가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윤리학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윤리는 그렇게 가도록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던 길을 멈추게끔 물음을 주는 것이다.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올바른 길을 자동으로 가려고 하는 자신의 의도를 시간을 들여 숙고하며, 쉽게 정답을 내리고자 하지 않는 일이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바로 그 사려깊음의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에는 끝이 없다. 완성될 수 없다. 때문에 윤리적으로 완성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어떻게?'라는 물음만을 정직하게 지속할 뿐이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을 지속해간다.
인간이 대체 무엇이라고, 그 지속에 이리도 힘을 들여야 한단 말인가.
존나 쿨하고, 힙하고, 자유롭게 살면 되는 것 아닌가. 클럽에서 입구컷 당할 법한 찐내나 풍기는 진지충처럼 무게잡으며 사는 일은 심히 구려보인다.
자신을 괜찮은 인간인 것처럼 지속하려는 데 가장 많은 힘을 들이는 이들만이 대개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힘드니까 힙한 척해보는 이들이다.
이런 힙스터 워너비들이 나중에 자기 자식이 생기면 진성 꼰대가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거의 히로시마급으로 팩폭을 할 수 있지만, 힘을 들이기 귀찮아 하지 않으련다.
대신에 나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음과 같이 살짝 바꾸어보는 일에만 힘을 가용해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나는 이 물음의 형식이 좋다.
이 물음 속에서 '어떻게?'는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인간이라고 하는 것을 꿈꾸어보게 하는 기능을 정확하게 수행한다.
우리의 꿈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다. 그렇지 않은가?
분주한 방학생활 계획표 같은 시스템의 알고리즘 속에 매몰되어 잠깐 잊었을 수는 있어도, 그러면 꿈에서도 나온다. 꿈에서도 인간이 눈에 선하다. 그래서 다시 기억한다.
인간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되고 싶은 것이었다.
물을 마시고 싶으면서, 존나 쿨하고, 힙하고, 자유롭게 살아야지 힘들게 물을 마시는 일은 한심하다고 말하는 일을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마음은 꿈이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꿈이며, 우리를 인간으로 안내하는 꿈이다.
마음에는 오직 이 인간에의 꿈만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음을 살면 인간을 사는 일이다. 반대로도 말해보자.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산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은 이렇게 구성된다.
마음으로 사는 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상을 나는 심리학적 일상이라고 부르겠다.
심리학적 일상 속에서 우리는 충분히 시간을 들여 인간을 생각하며 인간이 되어간다. 아주 오래된 좋은 꿈을 이루어간다.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을 이루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다.
행복해지는 것은 정말로 간단했다.
인간을 그만 두면 되는 것이었다.
올바른 길을 향해 임의로 가공하지 않고, 인간이라는 이 순수한 꿈을 그대로 두기만 하면 그것은 마음을 따라 반드시 이루어가는 길이었다.
어떠한 상담관련 수업에서든 학기의 마지막이 되어갈 때 나는 거의 반드시 윤리 얘기를 하곤 한다.
혹시라도 상담수련생들이 윤리선생이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상담사들이 "보라, 여기에 인간이 있다."라고 인간성을 대변하는 존재들일 수 있기를 가득히 꿈꾼다. 인간성은 인간이라는 정답을 결과로 채택하는 성질이 아니라, 인간으로 되어감의 과정을 지속하는 성질이다. 그것은 아마도 끝없는 되어감일 것이며, 매일의 일상에서 '어떻게?'에 대답해가는 시간들일 것이다. 그 정직한 시간이야말로 윤리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리라.
이제 정말로 이 연작글도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기에, 나는 윤리 얘기를 한다.
우리가 인간을 꿈꾸는 심리학적 일상은 이 글이 끝남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글의 끝과 함께 이제야 시작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속해갈 어떠한 기쁨이고, 어떠한 행복일 것이다.
어제는 작은 방아깨비가 놀러왔고, 오늘은 사마귀가 놀러왔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대답하고 있던 그대들이었다. 쉰넷째 날도 좋은 꿈을 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