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14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저주에 걸린 크툴루"

by 깨닫는마음씨




이 시대의 젊은 영혼들이 괴로운 것은 저주에 걸려 있어서다.


차라리 두꺼비로 만드는 못된 마녀의 저주가 나았으리라. 지금 이 저주는 가장 그들의 편을 자처하고자 하는 우호적인 의지에서부터 온다.


저주라는 것은 묶는 것이다. 특정한 상태로 고정되게 하는 것이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현상을 속박하는 저주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선하게 보이는 말들이 저주로 작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은 그 표현에 있어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까닭에 우리는 그 표현이 지시하는 상태들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구속되기까지 한다. 자신이 자발적으로 저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저주문에 대해 말하고 싶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는 심지어 누가 이 저주를 자신에게 내려달라고 간절히 원하게도 되는 저주문이다.


이 저주가 의도하는 상태는 분명하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아이'다.


이것은 영원한 아이의 상태에 우리를 묶어놓고자 하는 저주다.


그렇게 아이의 상태로 고정되는 대신에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지원을 해주겠다는 등가교환은 이루어진다. 나이키 한정판과, 닌텐도 스위치와, 파인다이닝 코스요리와, 5성 호텔 숙박권 등이 제공된다. 발레 교습도 받고,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도 탐방가고, 뉴욕에서 미디어아트를 배울 기회 등도 얻을 수 있다.


마치 착한 마법사가 소중한 아이들을 위해 내려주는 축복의 마법쯤으로 인식되기에 딱 좋다.


그러나 저주가 저주인 것은 결국에는 우리의 삶을 곪게 만들기 때문이다. 착한 마법사가 준 사탕을 먹고는 영혼이 다 썩어 아프다고 아이들은 밤잠을 설친다. 정신과에 가서 항우울제와 수면제 처방을 받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는 나날들이다.


어떤 선의는 분명한 독이다.


우리 영혼의 치명적인 독은 바로 죄책감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계속 곪아들어가게 만든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라는 마법사의 친절한 미소 앞에서 우리는 진실로 행복할 수만은 없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라는 말은 '하고 싶은 걸 다 (잘) 하는 아이'가 되라는 저주다.


운동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하고, 연애도 잘 하고, 친구도 잘 사귀고, 커피도 잘 내리고, 마음도 잘 알며,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잘 하는 역량을 통해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당당하게 자기의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아이가 되라는 그 저주다.


이런 아이의 모습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이에게 착한 마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가 뭐가 부족해? 엄마아빠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지원해줄 거고, 니가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니가 원하는 거 다 해보고 너는 젤루다가 행복하면 돼. 엄마아빠는 그거밖에 없어. 그거 위해 사는 거야."


우리는 지금 죄책감공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견학하고 있는 중이다.


이 시대의 젊은 영혼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죄책감이 만들어낸 초조함이다.


그들은 이렇게나 자기에게 다 해준 그 거룩한 부모가 꿈꾸는 아이상에 부응하기 위해, 끝없는 압박감과 영원히 쫓기는 기분을 느낀다.


그들은 소위 말해 신과 같은 부모에게서 너도 신이 되라고 요청받고 있는 것과 같다.


표현 그대로다.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신이지 않은가.


인간에게 신이 되라는 것, 이것은 가장 심대한 저주다.


자신이 신이지 못해 경험하는 죄책감은 가장 빠르게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그렇게 인간의 영혼이 좀먹은 비루함의 끝에 태어나게 되는 것은 못된 신이다.


크툴루의 탄생이다.


착한 마법사가 부린 마법의 결과는 자기 자신을 하찮은 벌레처럼 경험하게 됨으로써 인간을 벌레처럼 우습게 여기게 되어버린, 못된 신 크툴루다. 그래서 이것은 저주다.


못되다는 것은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개념은 경계를 흐릴 때 없어진다. 경계를 흐리는 이유는 경계를 빨리 뛰어넘어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이다. 쉽게 말해 빨리 잘 해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개념을 상실하게 만든다.


모든 것을 빨리 잘 하기 위해, 아이들은 정보를 끌어모은다. 유튜브나 나무위키 등지에서 각종 분야의 정보들을 끝없이 수집하고는 그 분야에 대해 잘 아는 척 행세하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이 모든 분야에서 다 잘 하는 흡사 초등학교 반장과 같은 인생마스터처럼 보이기를 꿈꾼다.


얕은 정보들을 모아 깊은 척하고자 하는, 경계를 흐리는 일이고, 개념이 없는 일이다.


이 얕은 정보들을 취합한 아이들을 칭찬해주는 권위기생충들도 이 지점에서 개입한다. 이들은 아이들이 얕은 정보들을 얻는 일을 도와주기도 하며, 그 정보들이 얼마나 가치있고, 또 그런 것을 얻은 아이들이 얼마나 우수하고 특별한 사람인지를 '인가'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럼으로써 이러한 기생충들은 친절하게 아이들의 비위를 맞춘 그 결과로 진정한 전문가라는 권위를 얻게 된다. 그러니 실은 기생이라기보다는 공생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개념없음이 개념없음을 연쇄하는 공생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거짓의 인가들을 얻는다 해도 죄책감이 사라질리는 없다.


왜 그런지도 분명하다. 이러한 얕은 것에 대한 인가는 이 시대의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만 알고 있는 특별한 레시피가 아니라 유튜브 어디에서 다 널려있고, 모두가 그 레시피에 따라 똑같은 음식을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만 초등학교 반장 같은 특별한 위상을 얻을 수는 없다.


집에 가면 그래서 언제나 부모에게 고백해야만 한다.


"엄마, 아빠, 이번에도 반장이 되지 못했어요. 엄마아빠가 캐나다에 어학연수도 보내주고, 유라시아 오토바이 횡단여행도 보내주었는데 저는 안되는 사람인가 봐요."


그러면 착한 마법사는 고운 눈길로 이 불우한 아이들을 위로한다. 자신이 언제 반장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랐냐고, 그저 너 하고 싶은 걸 다 해보며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라고, 이제는 백색의 간달프로 진화해서 더욱 숭고한 자비의 손길을 건넨다.


거룩함은 한층 더 쌓여가고, 죄책감도 한층 더 쌓여간다.


차라리 인생 똑바로 살라고 뺨이라도 한 대 맞았더라면 아이들의 마음은 편해졌으련만.


이 거룩한 성스러움 앞에 대들 수조차 없는 아이들은 지옥에서 혼자인 크툴루다.


누적되기만 하는 죄책감의 무게에 시름하다가 마약도 빨고, 사기도 치면서, 자신과 세상을 같이 망칠 궁리만을 한다.


차라리 망가져서 '나쁜 아이'가 되면 좀 편해질 것 같아서다.


다 같이 지옥에 가면 조금은 덜 외로울 것 같아서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못된 신으로 드러난 나쁜 아이가 되면 이제 이런 말들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 젊은 것들은..."

"MZ세대는 역시...

"또 당신입니까?"


어디에서 숨을 쉬어야 할까.


젊은 영혼들은 숨쉴 곳이 없다.


착한 마법사들이 내뿜는 유독한 저주의 대기에 정신이 혼미하다. 몸에 힘이 풀리고, 현기증이 난다. 창백해진 얼굴은 어디로 가야 할지 자신을 위한 쥐구멍 하나라도 찾지 못한 우주의 미아의 모습이다. 공황장애라고도 부를 것이다.


우주에서 홀로 버려진 저주받은 신 크툴루의 모습이 이러하다.


무엇이 이 크툴루를 만들었는가?


마법사들의 선한 의지로 가득한 그 저주가, 그 신념이, 그 언어가 인간을 괴물로 만들었다.


착한 마법사는 언제나 3000만큼 코즈믹호러를 꿈꾼다.


자신이 그 코즈믹호러의 현실의 구원자이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 바로 그 욕망으로 인해 못된 신은 만들어지고 선한 신에 의해 계도되는 역할이 부여된다. 선한 신은 못된 신을 인내하고 감수하며 최후의 순간 끝내는 못된 신이 참회의 눈물을 쏟게 될 날을 기다린다. 그 날이 오면 누가 참된 신이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모두가 그 광명을 찬미하게 되리라.


착한 마법사들 자신의 부모에 대한 죄책감이 이러한 삼류판타지의 각본을 만든다.


젊은 영혼들은 달콤한 사탕으로 유혹되어 영문도 모른 채 이 삼류연극판에 끌려들어가, 주인공(GOAT) 같지만 실은 희생양(goat)의 역할을 떠맡는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것은 원래 원시주술사회에서 제물로 바쳐질 이에게 하던 말이다.


희생양으로 강물에 던져질 운명은 확정적이니 그 전까지 삶에 미련갖지 말고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라는 그 말이다.


누군가를 제물로 바쳐 전진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것은 야만이다.


그것도 무수한 젊은이들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코즈믹 호러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와 같은 영화는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조커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은밀하게 강요된 꿈속에서 자신을 잃게 된 희생양의 모습이다.


크툴루도 영원한 꿈속에 봉인된 신이다.


우리가 받는 최고의 압박은 하고 싶은 것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다. 자신만의 소중한 꿈을 찾아야 한다는 그 강박이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우리가 걸려 있는 바로 그 저주의 내용이라면 어떨까?


"하고 싶은 게 없어요."


젊은 영혼들의 이 대답은 실은 가장 정직한 것일지 모른다.


저주의 말에 동의함으로써 저주에 걸리지 않겠다는 필사의 저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숨만 쉬자.


분명하게 배의 깊은 끝까지 숨만 쉬어보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분명해진다.


마음편히 숨쉬는 일이 간절한 소망이 되어버린 조금 미친 시대가 속상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의 숨은 묶이지 않았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간다.


우리는 지금 디톡스 중.


유독한 언어의 저주를 우리 생명의 호흡으로 풀어내고 있다.


숨만 쉬어도 내가 인간이다.


어느 날엔가 문득 그 사실이 사무칠 때, 온통 명징해질 때, 경외하라, 태초의 바다가 입을 크게 열고, 잠든 위대한 옛 존재가 깨어날지니.


우리들의 반격은 그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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