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아무 이야기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추상적이지 않은 유일한 것은 몸이다.
추상적이지 않기에 그것은 어떤 이야기도 아니다.
몸은 다만 사실일 뿐이다.
몸으로 사는 삶을 실존한다고 말한다.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일이다.
나를 찾으려면 이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나는 이미 이 몸이기 때문이다. 눈이 자기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나는 내가 어떤 기억과 욕망의 조각들을 모아 이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라, 그냥 이 몸이다.
우리가 나라고 늘 착각하고, 또 일부러 오해하고 싶어하는 것의 정체는 내러티브로 만들어진 추상의 통합체다. 서사정체성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은 자기 삶의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수집한 추상적 자료들을 조립해서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낸 언어적 발명품이다.
인간이 온갖 추상적인 것에 질서를 부여하여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것은 또한 윤리다.
그래서 윤리는 이야기 위의 이야기다. 추상적인 각종 이야기들을 통합하는 메타적 이야기다.
원래 몸에는 윤리가 필요없다.
가만히 놓아두면 자기의 욕망으로 나쁜 짓을 한다고 믿어지던 그것은 몸이 아니라, 개인이 이야기로 만들어낸 정체성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욕망의 반영이다. 그러니 이야기로 만든 정체성을 가만히 놓아두면 이것은 언제나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타자를 착취하고 남용하는 현실을 빚게 된다.
현실에서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들은 자기의 이야기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방증이다.
이와 다르게 몸은 순수한 필요에 의해 스스로 균형을 이루며 작동한다. 과잉도 결핍도 아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가 실은 몸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스스로 충족되는 길이다. 그렇기에 결핍과 과잉으로 생겨난 자기의 욕망에 치여 타인을 괴롭힐 이유가 없다.
이를 유기체적 지혜라고 말한다. 인지과학에서는 몸이 알아서 가장 조화로운 활동을 구성해나가는 이 자생적 지속가능성에 주목한다. 이 몸이야말로 인간 마음의 구체적인 신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비로운 몸을 투박한 기계 다루듯이 통제하고 조작하고자 하는 것이 이야기다.
가장 추상적인 소재가 가장 사실적인 존재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삶에서 가장 먼 것이 삶 그 자체인 것을 이끌려고 하면 언제나 삶이 망가진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교묘한 전략이 시도된다.
자기의 욕망만을 생각하는 '나쁜 이야기'가 삶을 망가지게 했으니, 이제 모두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는 '좋은 이야기'로 삶을 치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나쁜 이야기만이 문제이고 그 나쁜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로 치유할 수 있다는 기획, 곧 윤리가 출현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아무 문제없던 우리의 몸[삶]에 병을 만든 뒤, 이제 또 약이 되려고까지 한다. 자기가 만든 독을 주입한 뒤 자기에게 유일한 해독제가 있다고 하는 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바로 몸에서 비롯한 나쁜 것들을 제거하고, 더 진정하고 훌륭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줄 수 있는 연금술적 명약의 권위를 이야기에 부여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사기술이다.
몸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과, 몸을 기본적으로 나쁜 이야기로 여기는 심대한 착각이 삶에 대한 이 사기를 지속하게 만든다.
이에 대한 이득은, 이 나쁜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최고의 추상적 정체성의 구성이다.
그것은 자기 몸을 연금술적 항아리로 쓰는 어떤 하늘의 눈 같은 마법적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만물의 수용자 같은 입장이 되어 자기가 경험하는 다양한 현상과 심리작용들을 자기의 몸이라는 연금술적 항아리에 넣는다. 그리고 여러 소재들이 항아리 속에서 일으키는 화학반응에 의한 괴로움을 감내하면서, 자기가 지금 그 소재들을 황금으로 만들어주는 신성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연금술사 놀이가 바로 메타인지의 기제로 우리가 몸을 도구처럼 남용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메타인지적 마법의 정체성을 나로 간주하고 싶어하는 이들은 정말 많다. 자기가 어떤 놀라운 경험을 통해 이제 나라는 것이 되었다고 말할 때, 그들은 자기가 이 정체성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서사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욕망과 그 욕망을 다루는 규범을 반영하여 만들어진다. 라캉이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 이유다.
그러니 우주 만물을 다 포괄하고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하려는 이 메타인지적 정체성은 가장 큰 서사정체성일 것이다. 정체성의 완성판이고, 궁극의 서사정체성인 셈이다.
그러나 뭐라고 부르든 간에 이것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나는 서사정체성 따위가 아니다.
나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알아주는 자 따위도 아니다.
그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정체성을 자유롭게 누려가는, 탈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메타인지적 정체성은 가장 아니다.
가장 큰 정체성일수록 가장 큰 이야기이며, 가장 큰 이야기는 가장 내가 아니다.
나는 좋은 이야기라는 이름의 어떤 약도 필요없는데, 나의 영혼은 병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만이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한다. 물론 이야기는 이야기에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다. 병주고 약주고를 하며 이야기의 권위만을 증진시키려는 가스라이팅을 할 수 있다. 치유라는 이름의 독에 중독되게 할 수 있다. 새로운 독이 돌아 기존의 독은 치유된 것처럼 착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로 살지 않는 나는 애초 그 영혼이 병들 이유가 없다.
나라는 이름은 이야기로 살지 않는 인간이 스스로를 알게 된 그 존재의 이름이다. 이 우주에서 이야기의 질병에 오염되지 않은 가장 건강한 이름이다. 좋은 이야기라는 독에는 더욱 중독되지 않은 가장 좋은 존재의 이름이다.
나는 이야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아무 이야기도 아니다.
내가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이 우주를 다 걸 수 있다.
우주도 좋아할 것이다.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것이다.
이야기에 의존해 거짓의 나를 세우고 있던 비루한 인간 존재가, 마침내 우주가 정성을 다해 만든 그 모습 그대로의 영혼의 빛을 다시 찾게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면, 우주도 자신을 다 걸 것이다.
그게 바로 이 몸이다.
우주가 자신을 다 걸어 이 몸이 되었다.
그게 나다.
휘트니 휴스턴이 Greatest Love of All에서 "My dignity"라며 부르르 떨 때 그것이 나의 떨림이지 않겠는가.
나의 존엄성은 여기에서만 비롯한다.
우주가 나를 이루려고 자신을 다 걸었다는 그 사실에만.
그러니 다 뺏겨도 나의 존엄성만은 뺏길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이야기로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야기가 다 없어진 속에서 나는 존엄한 그 영혼의 빛을 발한다.
별들이 이미 하늘에서 이렇게 빛나고 있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로 요란한 네온사인들이 사라진 그 하늘에서.
아무 이야기도 아닌 나를 비춘다.
그 어느 이야기에도 의존해서 서있지 않고, 그 어떤 이야기에도 복종하지 않는 존엄한 이 몸을 비춘다.
별빛이 깜빡이는 것은 그런 당신을 보고는 지금 부르르 떨고 있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에 의존해서도 또한 당신을 세워야 할 것이 아니다.
밤하늘의 별들에게 그 몸으로 직접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주도 지금 다 걸고 자신의 존재를 되찾고자 하는 당신을 무척 좋아할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다 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