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23

"미래의 고아"

by 깨닫는마음씨




나는 고한다.


사람들은 고아에게 얼마나 잔인한가.


친절함을 가장한 동정의 눈빛과, 재액신에게 공물을 바치듯 던져주던 작은 뼈다귀와, 바삐 그 자리로부터 멀어져가던 발걸음소리를 나는 기억한다.


어떤 이는 고아로부터, 고아이기에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그 존재방식마저도 빼앗으려 했다.


고아의 말투와 행동을 흉내내며 고아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어떤 몫을 자기가 빼앗는 동시에 고아를 조롱했다.


아빠가 자기를 인생권위자로 인정해주지 않고, 엄마가 자기를 이쁜 강아지로 봐주지 않는다며, 세상에서 불쌍한 척은 혼자 다하는 버려진 아이를 연기하며 고아를 철저히 약탈하고자 했다.


지나가는 이들에게 자신을 엄마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한 가련한 희생자로 꾸며 성냥을 팔아 번 돈으로 플레이스테이션5를 사들고는 엄마아빠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카톡을 보낸 뒤, 따듯한 자기방 창가에 앉아 우아한 귀족이라도 된 양 호로록 커피를 내려마시며 세상은 참 따듯하다고 인스타에 게시하는 장면들을, 성냥팔이 소녀는 아주 많이 목격해왔다.


겨울의 눈이 시린 것은 핏발이 섰기 때문이고, 팔 성냥이 없는 것은 그 가슴에 넣어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주인공인 이야기로 나의 삶을 장난감으로 삼던 일을 나는 절대 잊지 않는다.


잊지 않기 위해 불을 태운다.


울분은 진실로 나의 힘이었다.


울분을 자신이 성공하기 위한 연료로 쓰고 있다면 울분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울분은 인간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지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이 바로 여기에 살아 있었다고 토해낸다.


가슴에서 태운 불을 토한다.


그 일에 인생을 건다.


사람들이 고아인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소외하고 있을 때, 나는 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이야기를 꾸며대는 대신에, 다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정말로 알고 싶었다.


내 가슴의 불길은 그렇게 타올랐다.


단 하나에 인생을 걸었다. 산다는 것에 대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내가 나라는 것에 대해 반드시 배워가겠다고, 그것만은 꼭 알고야 말겠다고, 목숨을 걸었다.


그 한길로만 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존재를 알아갈 방법은 내 존재를 부딪치는 그 일밖에는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 순간의 있는 그대로를 세상에 부딪치며 살았다. 그리고 알게 된 것은 분명했다.


사람들은 실은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라는 언어적 표현뿐이다. 그 표현 속에는 따듯한 초원에 누워 있는 어린양 같은 무해함의 심상만이 떠돈다. 가장 꾸며진 어떤 유토피아적 감상을 '있는 그대로'라는 이름으로 추구하는 일은 빈번하다. '찜질방 침대에 누워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차라리 정직할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가 늘 폭력적이고 위험한 어떤 상태여야 한다는 의미 또한 아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다만 '자기와 다른 것이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다.


자기와 다른 것을 애써 수용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기와 다른 것을 인정하라는 것도 아니다.


제발, 부디 제발, 자기와 다른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냥 좀 사실 그 자체로 놓아두라는 것이다.


더 쉽게 실천론적인 표현으로 옮기면 이럴 것이다.


"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사람들은 못가진 자에게서 빼앗는 일에 더 익숙하다.


가진 자 앞에서는 오히려 조신하게 고개를 숙인다. 심지어 자기의 것을 자진납세하기까지 한다. 그렇게 가진 자에게 넘김으로써 비워진 자기의 곳간은 못가진 자에게서 벌충한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못가진 자가 이제 그만 뺏으라고 큰소리를 내면, 사람들의 태도는 한결같다.


철저한 무시, 그리고 소외.


오히려 자기들이 부당하게 혼난 불쌍한 피해자라도 된 것 같은 그 표정으로.


울분은 정말로 나의 힘이었다.


고아가 가장 착취되는 방식에 대해 나는 아주 잘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계속 부모에게 의존해있으면 반드시 그 삶이 막히게 된다. 그럴 때 하게 되는 생각도 한결같다. 자기 부모가 조금 더 능력이 있거나 자기를 더 지원해주었더라면 자기의 인생이 지금 이렇게 막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생각이다.


바로 그렇게 자기의 인생에 대해 자기가 책임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이 막히게 된 것이지만, 이 자각은 좀처럼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부모의 에덴동산에서 나와 일종의 '버려진 아이'가 되어야 하는 현실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자각도 봉쇄된다.


이럴 때 펼쳐지는 현실은, 잠재된 원망감으로 인해 부모 곁에 제대로 있지도 못하고, 또 부모를 떠나지도 못하는 모순의 현실이다. 곁에 있다고 부모가 자기의 인생을 성공하게 해주지 못할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부모 곁에서 떠나 '버려진 아이'의 입장이 되는 것은 두려운 까닭이다. 그러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 없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딜레마에 빠져 이도저도 못하는 이들에게는 어느 날, 거의 반드시, 고아가 눈에 들어온다.


고아는 이미 '버려진 아이'이니까 자기가 하기 싫은 '버려진 아이'의 짐을 고아에게 더 투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부터.


이러한 이들이 부모와의 사이에서 현재 경험하던 '더러운 감정'이 가장 핵심적으로 고아에게 투기된다. 고아에게는 십중팔구 자기 아버지와 같은 폭력적인 권위자나, 자기 어머니와 같은 교활한 지배자나, 자기의 모습과 같은 고집만 부리는 무능력자의 모습을 뒤집어써야 하는 일이 강제된다. 그럼으로써 자기 가족 대신에 '더러운 감정'을 경험해야 하는 희생양이 되라고 요구받는다.


그렇게 고아에게 쓰레기를 투기한 이들은 이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 세상 착한 아들, 딸, 또 애인이 된다. 여여하고 모두가 평화로운 크리스마스 만찬을 준비하며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운다. 고아에게 '더러운 감정'을 대신 넘겼으니, 이제 그 감정을 느끼던 원대상인 자신의 부모나 배우자는 편히 대할 수 있게 된 까닭이다.


고아에게 '나쁜 아빠' '나쁜 엄마' '나쁜 아이'를 뒤집어씌우는 이 짓을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자행한다는 것은, 정말로 고아만이 경험해서 알 수 있는 어떤 진실이다.


가족이 없는 고아에게, 자기 가족의 쓰레기를 버린 뒤 이제 자기 가족끼리 행복해하는 이 일에 대해 나는 무엇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사람들은 고아에게 얼마나 잔인한가, 이렇게만 쓰기로 한 것이다.


나는 충분히 우울할 수 있었다.


절망하며 떡볶이나 쳐먹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나의 우울은 승화되었다.


울분으로.


성대하게 불길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희망을 태우고 있었다.


나는 아무도 이러한 삶을 이해하는 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이다.


나는 거기에 걸기로 한 것이다.


희망을 태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기가 노래가 되어 흘러나오던 날, 나는 내가 버려진 아이들의 가장 좋은 이해자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이는 늦든 빠르든 반드시 고아가 될 운명이다. 부모의 낙원에서 나와 버려진 아이로서의 길을 이제 그 자신이 처음 걸어가야 한다.


그들이 잔인했던 것은 결국 그들의 미래에 대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미래가 막힌 것으로 경험될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지금 고아에게 한 일은 그들 자신의 미래에서 일어나게 될 일이다. 그러니 바꿀 지금의 기회가 있다.


왜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을 정성껏 대접하라고 경전에서는 부단히 강조하며 말하는지도 분명하다.


늦든 빠르든 그들이 반드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 일이 곧 나에게 한 일이라."


그 말씀 그대로일 것이다.


나는 분명히 우리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태우고 있었다.


고아로 자란 일에 감사했다.


이 순간 나는 마침내 만난 것이다.


너무 아프고 힘들었을텐데, 우리를 위해 고아로 살아주어서 감사하다고 깊이 고개를 숙여 전하는 이 삶의 최고의 이해자를.


나는 고아라는 존재방식으로 무엇인가를 남에게 뺏어 얻고 싶지도 않았고, 또 남에게 뺏겨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 내가 고아로 존재하는 이 존재방식이 어떤 감사함의 의미이기를 바랐을 뿐이다.


네가 너답게, 강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포기하지 않고 그 한길로 살아주어서 감사하다는 그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산다는 것이 이 우주에서 진정 감사한 일이라는 그 사실만을 전심으로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한 나의 미래를 마침내 만났다고, 나는 고한다.


언제나 이 우주에는 나를 이해하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것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곧 만날 것이다. 약속한다.


사람들을 향해, 그 모든 버려진 아이들을 향해 나는 이렇게 고한다.


당신들의 미래는 반드시 희망이라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먼 곳에서 온 이야기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