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배신"
또 이야기에 대한 비판이냐고 누군가는 지겨워한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라고 그 누군가는 말한다.
내가 드러내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지겨워하면서, 동시에 계속 이야기를 청한다.
이야기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처럼 끝없이 이야기에 빠진다.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몹시도 화가 나있다. 그 화는 어떤 커다란 배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이야기가 배신했다.
이 시대에 범람하고 있는 그 모든 자기계발서의 내용들은 사실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진담이다.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라."
다 이 얘기뿐이다. 어떤 자기계발서라도 표현과 개념어들만 다르게 쓸 뿐 이 내용의 동일한 반복일 뿐이다.
이것은 미시담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미시담론은 표현 그대로 '작은 이야기'다.
사람들 각자가 자기만의 '작은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이 시대의 안전과 성공이 보장될 것처럼 여겨진다.
또 그런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힙한 활동이라고도 말해진다. 물론 아니다. 첫째로 포스트모더니즘이 결코 최신의 힙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니고, 둘째로 애초에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라는 점에서 아니다.
작은 이야기에 대한 강조는 거대한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선적으로 시도된다.
오늘날 개인이 접하게 되는 정보량은 그 개인이 평생을 다해도 소화할 수 없는 양이다. 밀어닥치는 이 정보의 홍수에 질식할 것만 같다.
이러할 때 작은 이야기가 추구된다. 마치 늑대의 습격 앞에서 아기돼지 삼형제가 짓는 벽돌집처럼, 개인이 스스로 만든 작은 이야기는 자기를 잃게 만들 것 같이 두렵고 큰 것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간주된다.
이것은 심리상담의 무수한 장면들에서도 방증된다. 지금 두려움을 크게 경험하는 이일수록 자기가 생각으로 만든 자기 스토리에 더욱 몰두하는 경우는 지배적이다. 어떤 맥락에서도 그 작은 이야기의 진리성만을 고집하며, 나아가 자기의 작은 이야기를 공식적인 진리로 인가해줄 도구적 대상으로 상담자를 남용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작은 이야기에 집착하는 이들은 큰 상처를 받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이야기다.
이야기가 배신했다. 그들은 이야기로부터 배신당한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어떠한 이야기인가?
거대담론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이야기'다.
작은 이야기에 집착하는 이들은 거대한 이야기에 당한 상처가 아파서 작은 이야기로 더욱 철저히 자신을 방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묘사하는 스케일이 크다고 그것을 '거대한 이야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거대한 이야기는 이념적 이야기를 지칭한다. 인간의 삶을 그 앞에서 이끌고자 하는 앎의 이야기다. 목표는 분명하다. 유토피아다. 거대한 이야기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념의 이야기다. 제시되는 이야기의 이념만 따라 살면 우리가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거대한 이야기는 윤리적인 속성을 갖는다. 또 공동체를 지향하는 속성을 갖는다. 거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집단을 구성하고 지속하는 집단의 규범이 된다.
이것은 마치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내려진 신성한 약속과도 같다. 예언적 속성이다. 집단의 규범에만 충실하면 너는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행복한 천국을 얻게 되리라, 말하자면 그러한 약속이다.
아이들은, 특히 진보적 이념의 장에 있던 아이들일수록, 이 약속이 깨지게 되는 현실을 반드시 경험하고야 만다.
엄마아빠의 말만 따르면 세상의 주인공처럼 살 수 있다 해서 충실하게 따랐더니 오히려 현실에서는 붕뜬 부적응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부모 없이는 더욱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어가는 것처럼 절망적으로 경험된다.
아이들이 부모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부모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속인 것 같아 커다란 원망감도 생겨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물리적/심리적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에 대해 직접적으로는 표출할 수 없는 배신의 분노를 숨기기 위해 늘 자신을 억압하며 만성적인 우울에 빠져들곤 한다. 중독이나 자살도 이 상태의 부록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필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들만 속은 것이 아니라, 부모도 속았다는 점이다.
부모가 아이를 배신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배신했다.
부모가 믿고 있던 거대한 이야기가 부모와 아이를 동시에 배신한 것이다.
거대한 이야기가 우리들을 배신하리라고는 차마 상상하기 어려웠다. 인간을 위해 너무나 좋은 내용으로만 가득한 것이 거대한 이야기였던 까닭이다.
우리가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미숙한 입장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당당한 개인으로 일어선다. 자기만 생각하는 도구적 지성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생각할 줄 아는 윤리적 지성이 우리를 일깨웠다.
그렇게 다 상냥하게 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지성은 먼저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기능하기 시작한다. 철없이 날뛰던 감정들이 실은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는지 그 진가를 알아봐줌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지성은 감정이라고 하는 모든 마음이 깨닫게 하는 일에 성공한다. 깨달은 마음들은 이제 스스로 조화롭게 질서를 지켜 나가는 내면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의 내면을 다스리는 일을 실현해 내면의 제왕으로 등극한 우리는 이제 외부의 현실로 나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려고 한다. 마음들을 깨닫게 하듯이 사람들을 알아주어서 그들이 깨닫도록 도움으로써, 깨어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당히 앞장서고자 한다. 그것이 멋지게 우리 자신을 책임지는 길이고, 또 우리가 개인으로 일어서도록 도와준 이 모든 세상에 보답하는 길이다. 우리는 이 역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멋진 주체들이다.
유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같은 내용이다.
이것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념적 이야기들, 즉 거대한 이야기들이 담지하는 보편적인 내용이다.
이 거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실패해서 결과적으로 우리를 배신하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말은 심대하지만, 심대한 만큼 그 말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는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의 몸을 벗어난 추상적 말들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에, 실제의 몸을 가진 어떤 인간도 이 거대한 이야기를 현실화할 수는 없다.
실패는 필연이며, 배신도 필연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언제나 인간 모두를 배신한다.
그 배신감이 너무 쓰라린 이들은 이제 더는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거대한 이야기'가 자기에게 침투해오지 못하게끔 그에 대한 방어책으로 '작은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게 된다.
그 작은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된다.
내가 주변에 민폐만 끼치는 미숙한 입장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당당한 나로 일어선다. 자기만 생각하는 도구적 지성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생각할 줄 아는 윤리적 지성이 나를 일깨웠다.
그렇게 다 상냥하게 알아볼 수 있는 진정한 지성은 먼저 나의 내면에서부터 기능하기 시작한다. 철없이 날뛰던 감정들이 실은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는지 그 진가를 알아봐줌으로써, 나의 진정한 지성은 감정이라고 하는 모든 마음이 깨닫게 하는 일에 성공한다. 깨달은 마음들은 이제 스스로 조화롭게 질서를 지켜 나가는 내면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의 내면을 다스리는 일을 실현해 내면의 제왕으로 등극한 나는 이제 외부의 현실로 나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려고 한다. 마음들을 깨닫게 하듯이 사람들을 알아주어서 그들이 깨닫도록 도움으로써, 깨어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당당히 앞장서고자 한다. 그것이 멋지게 내 자신을 책임지는 길이고, 또 내가 개인으로 일어서도록 도와준 이 모든 세상에 보답하는 길이다. '나들'은 이 역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멋진 주체들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는가?
'거대한 이야기'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이야기'의 내용은 실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로 서술되던 주체가 '나'로 바뀌었을 뿐이다. 단지 그것뿐이다.
똑같은 유토피아적 이념의 이야기다.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의 몸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단지 이야기로만 부유할 뿐인 공허한 이야기다.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라."라고 열렬히 외치고 있는 자기계발서들, 연예인들의 트위터 명언, 또 인플루언서들의 강연내용을 살펴보라. 다 동일한 이 주장이다.
'거대한 이야기'에 '작은 이야기'라는 포장지를 입힌 것뿐이지, 내용에는 변함이 없다.
유일한 표면적 차이점이라면, 기존에는 남이 만든 이념을 쫓아 살았지만, 이제는 자기가 만든 이념을 쫓아 살라고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차이점이 아니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이미 남들의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서다.
자기가 만든 이념을 쫓아 살기 위해 구성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보면 이 점은 분명하다. 기존에 남들이 만든 이야기와 그 내용이 동일하다. 누가 지어냈든 다 동일하다. 죄다 모방과 복제만을 거듭하고 있는 동일성의 이야기다.
모두가 하나하나 당당한 개별적 주인공으로 일어선 뒤, 이제 서로 협력해가며 선한 영향력을 주고 받는 이 이야기는 정확하게 근대에서 온 이야기다. 근대의 정점이자, 근대의 낭만이며, 근대의 유산이다.
니체가 죽어라 그 허위를 폭로하려 했던 근대의 이야기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렇게도 해체하고자 했던 그 근대의 이야기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를 배신한 바로 그 이야기다.
우리는 거대한 이야기에 배신당해왔으니 이제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배신한 것은 작은 이야기다.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라, 라는 이 말만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칼을 꽂고 있다.
언제나 이야기가 배신했다. 거대한 이야기만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이야기가 더욱 배신했다.
늘 인간이 쫓아 살려고 하는 이야기만이 인간을 배신한다.
앎이 삶의 앞에 서서 삶을 이끌려고 하면 그 삶은 반드시 망쳐진다.
자신이 직접 자신을 위해 만든 이념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신이 얻은 어떤 앎이라도 언제나 미지수인 삶보다 결코 클 수 없다. 건방지게 삶 앞에 설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이야기 따위가 건방지게 존재가 가시는 길을 그 앞에서 지도하려고 하면, 존재는 방향을 튼다.
살랑살랑 눈웃음을 지으면서 이쪽이 유토피아[천국]로 가는 길이라고 존재에게 부드러운 말을 건네며 은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이야기 앞에서, 존재는 정반대로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간 뒤 이렇게 말한다.
"X까. 내가 있는 여기가 천국이야."
나는 말했던가.
존재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존재만은 우주의 단 한 순간도 인간을 배신한 적이 없다.
이 존재를 잃은 사람들이 이야기가 없이는 살 수 없어 한다.
이야기는 존재의 대용품이다. 존재를 잃었기에 이야기로 사람들은 어떻게든 대신 존재하는 척하려는 것이다.
그러다가 배신의 아픔만을 거듭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가?
남들이 다 쫓아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만을 위해 내가 만들어 내가 쫓아 살기 위한 '작은 이야기'가 필요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작은 존재'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감하면 그 '작은 존재'가 실은 얼마나 '거대한 존재'인지도 바로 회복된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들이 실은 하나의 존재함이라는 사실 또한 이내 다가오게 된다.
이 존재의 사실과 가깝게 살고 있는 이들은 그래서 유튜브나 OTT 같은 것은 보지 않는다. 억지로 보고 싶은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다는 감각이 의식에 아예 없다. 이야기가 지배하는 현실에 자연스레 이끌리지 않게 된다.
이들은 숨만 쉬어도 왠지 엄청 행복한 조금 미친 현실을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러고만 있어도 존재의 사실로부터 필요한 것들이 다가온다. 지혜롭게 잘 알게도 된다. 무엇보다 그렇게 이 모든 것을 존재의 사실로 새롭게 배워가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진다. 불감증이야말로 존재의 사실을 사는 이들에게서 가장 먼 것이다.
그리고 또 먼 것은 지금 이런 글이다.
그들이 이미 분명한 실감으로 살고 있는 현실을, 되지도 않는 언어로 가엾게 묘사하려는 이와 같은 종류의 글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것을 마치 절실하게 필요한 것처럼 하지 않기에, 이러한 이들은 배신당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불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여분이다.
여분은 재미를 위한 것이다.
이야기는 재미다. 그게 다다.
그리고 그게 다인 것만으로 이야기의 가치는 고귀하다. 이야기라는 여분을 소비할 수 있다는 자체가 인간이 얼마나 여유로운 생명체인지를 방증해주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야기가 작동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점은 분명해진다.
인간이 자신의 시간을 누리는 소재이기보다, 오히려 인간의 시간을 빼앗고 있는 소재일 때, 그러한 이야기는 주제와 분수를 모르는 이야기다.
주제와 분수를 모르는 이야기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던 존재의 전통이 선(禪)인데, 이것은 인간이 착각에 빠져 이야기에 목숨을 걸거나 이야기에 목숨을 맡기는 일이 얼마나 코미디인지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의 대화에는 웃음이 흐른다.
이것은 자유의 웃음.
반드시 인간을 배신하는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영영 해방되었다는 그 웃음이다.
인간이 이야기를 배신했다.
마시라고 만든 컵을 뒤집었다.
어떤 새로운 것이 막 창조되려고 하는 그 순간이다.
정말로 즐거운 존재의 활동이 막 펼쳐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웃음이 나온다.
이미 인간은 이야기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태초의 유토피아를 자기 발로 벗어난 전적이 있다.
그리고는 인간 자신에 의한 새로운 이야기를 써간 것이 아니다.
아무 이야기도 아닌 그 몸의 발자국만을 끝없이 종으로 횡으로 이 대지에 새겼다.
그 작은 몸으로 아주 거대한 창조적 그림을 그렸다.
인간이 이야기를 배신하는 일, 그것이 창조다.
작은 존재가 자신의 거대한 존재함을 증거하는 일이다.
이것이 이 우주에서 가장 자신의 시간을 누리고 있는 행복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는 지금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