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심리학 #25

"존재의 심리학"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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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는 존재의 역사다.


그래서 역사(history)라는 단어는 역사(cosmostory)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그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것이 조화로운 이야기'다.


그러나 실은 이것은 이야기가 아니다. 지나간 상황을 돌아보면 기가 막히게 요소요소들이 잘 들어맞아 어떤 온전한 감각으로 지각되기에 이야기처럼 착각되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오랜 인식의 습관이 자꾸만 인과관계의 알고리즘으로 현상을 이해하려 해서 생겨난 착각이다.


정확히는, 다 온전했다, 이것이 다다.


그게 왜 온전했는지 이런저런 정합적 이해들을 시도함으로써 온전함을 일종의 스토리적 요소들이 잘 배치된 문학적 효과로 파악해보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 요소들을 다시 정교하게 순서대로 배치한다고 해도 동일한 효과는 나지 않는다.


즉, 온전함은 서사적 장르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카이로스의 순간이다. 그 완벽한 순간이 끝없이 연쇄되는 것이다. 아무 인과관계도 없이, 또는 그 어떤 인과관계를 떠나 일어나는 완벽함으로의 도약이다.


때문에 온전함은 성장과 발전이라는 축 위에 있지 않다. 어떤 이가 그 자신의 스토리 속에서 노력해왔기에 온전함이 그 결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온전함은 결코 '그의 스토리'일 수가 없다.


이것은 다만 존재가 하는 일이다.


주동자는 개인이 아니라 존재다.


존재는 온전하다. 존재 자체가 온전하다는 그 사실을 개방하기 위해서만 움직인다. 그리고 이 움직임이 인간사의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어떤 섭리와도 같이.


우리의 삶은 온전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존재가 뜻하는 바에 따라 펼쳐지게 된 바로 그것이다.


존재의 뜻을 만나게 된 순간을, 우리는 의미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즐거움과 감동은 여기에 있다, 라고 하이데거는 말할 것이다.


인간은 존재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생명체다. 그 존재의 뜻이 자신에게 얼마나 구체적으로 의미로운지를 여실히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생명체다.


존재의 동반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정확히는 존재와 하나된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이러한 우주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원인은, 나는 정말로 궁서체로 강조한다 아니 궁서체가 없으니 명조체로 강조한다, 바로 정체성이다.


특히 이 정체성이라는 것을 자기가 임의적인 언어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스토리텔링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인간의 추락은 끝이 없다.


인간이 자신을 정체지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겠다면, 이미 인간 앞에는 존재가 서있다.


존재를 전면적으로 향해 있는 바로 그것이 인간의 정체다.


존재를 향해 그 자신의 가슴을 활짝 펼치고 있기에 인간은 인간인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존재로 말미암아 나인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아, 내가 존재했구나, 문득 이것을 실감한 이는 어마어마한 신비감에 휩싸인다. 존재의 크기를 아주 어렴풋이나마 그는 직관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이 몸뚱이의 질량감이나 자기 주변의 방대한 관계지도에 대한 체감 같은 것이 아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것은 명징한 반석이다.


불확실성과 불안감으로 가득찬 우리의 삶에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어떤 것이다.


허깨비들 사이에서의 유일한 진짜라고 말해도 좋다.


그리고 이 유일한 진짜가 인간을 위해, 내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존재의 역사는 통째로 인간을 위한 역사였다.


존재를 만나 그 반석 위에 자신이 안착되어 있단 사실을 알게 된 이는 그래서 이제 두려울 것이 없어진다.


그가 존재의 사실을 말하면 말할수록 그 자신이 반석에 더욱 안착되어 간다는 것 또한 그는 이해하게 된다.


그러니 그는 스토리의 중요성이나 스토리의 마법 같은 식의 말은 더는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서다.


존재를 만난 그 자리에는 아무 스토리가 없었다. 스토리를 써서 존재의 자리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스토리는 단 1mg조차도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전적으로 존재와 무관했다.


자기는 이 모든 것을 다 알기에, 존재를 향한 길에는 존재의 사실을 말하고, 사회적 성취의 길에는 스토리를 말한다고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면서 자신은 두 길 사이에서 지혜롭게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전적인 착각이다. 또 오만이다 그는 아는 척하지만 실은 존재의 사실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기에, 존재와 스토리를 동등한 저울 위에 올리고 있는 것이다.


존재는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나, 스토리는 자기 힘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그는 존재에 대한 신뢰가 없기에 스토리를 의존하겠다고, 다만 두려워하고 있는 상태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바로 스토리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스토리가 보잘 것 없거나 망쳐질까봐 두려워하며, 또 우리보다 대단한 것 같은 남의 스토리를 두려워한다.


오늘날 우리는 두려워서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두려워진다. 이것이 오늘날의 두려움의 양상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존재를 만나고 존재의 사실을 정말로 알게 된 순간 완전히 없어진다.


그리고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이 현실이 정말로 우리 모두가 원하던 그 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이는, 이제 사람들에게 그런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전하고자 한다.


스토리에서 벗어나, 그럼으로써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정말로 그 자신으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감동의 현실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왜인가?


온전함은 언제나 다 온전했다, 이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존재를 만나 온전함을 회복하게 될 때 그것은 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 순간 우리 모두의 조화로움이 증대된다.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존재한다는 것이며, 누군가가 온전함을 얻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온전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를 만나게 된 이는 자기만 아는 어떤 특별한 보물을 얻었다고 경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더욱 존재의 반석에 안착하고자 한다면, 그는 더 많은 이들이 존재를 만날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그 자신이 존재의 사실을 계속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말할수록 말할 꺼리가 사라지는 것은 이야기뿐이다.


존재의 사실을 말하는 일은 존재로부터 말함의 소재가 끝없이 공급된다.


이것이 존재를 가장 가까운 자신의 편으로 삼아 존재의 동반자로서 사는 인간의 일이다.


이렇게 살 때,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이 아주 의미롭다고 경험한다. 꽉 찬 것 같고, 생기어리며, 가장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힘이 난다.


존재가 지금 존재의 일을 하고 있는 그 인간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은 그 어떤 허깨비들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진짜인 존재에게만 복종한다.


나는 지금 다른 소재들과 존재를 같은 저울 위에 놓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 한다. 다른 것들도 다 진짜인 것인데, 그 중에서 존재가 유일하게 진짜 좋은 것이라고, 무슨 아빠가 사준 장난감 경쟁을 하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짜로 살고, 진짜로 죽는다.


이것만이 진짜다.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의 사실은 통째로 유일하게 진짜인 것이다.


이 사실을 흐리고 있으면 계속 허깨비들에게 공략당한다.


스토리는 특히 죽음의 문제를 망각하거나, 회피하거나, 해결해줄 수 있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가상의 신적 권위를 곧잘 행사하려고 한다.


개인의 몸이 사라질지라도, 스토리를 통해 그는 영원하다는 식이다.


그렇지 않다.


그는 진짜로 죽었다.


그가 쓴 스토리를 후대의 사람들이 수천억 번 되풀이 해 읽는다 해도 그는 살아나지 않는다.


존재의 사실을 스토리로 무시하고 은폐하려 하는 한 이러한 개인은 평생 스토리로 결코 극복될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살게 된다.


오히려 존재의 사실에 자신을 개방해 직접적으로 존재의 사실을 자신의 편으로 삼으려는 이는 다르다. 그에게는 완전히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


그가 두렵다고 오해하던 것이 오히려 그의 막강한 힘이 되어준다.


그는 존재의 역사에 합류한 것이고, 이제 존재가 그의 최고의 아군이다.


그러나 인간은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났었다.


인간 자신이 최고의 아군을 늘 배신하며 살아왔던 것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본래적인 입장을, 그 존재방식을 다시 찾아야 하는 일이다. 존재와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그 필요다.


인간이 매일매일 경험하며 살아가는 존재현상인 마음을 그 회복의 단초로 삼아 존재의 사실을 회복해가려는 한 방식이 있다.


'존재의 심리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에게 가장 멀리 위치해 있는 것처럼 간주되는 어떤 지평과, 현재 이 지점의 우리를 연결지으려는 시도다.


더 쉽게 말해, 존재와 우리 사이에 다리놓기다.


존재와 우리 사이에 생겨난 배신의 간극을 극복하고 신뢰의 다리를 다시 놓으려는 갸륵한 기획이다.


선(禪), 실존주의, 깨달음 등과 같은 언술들이 이 '존재의 심리학'의 대표적인 표현들이다.


먼 곳에서 온 심리학이며, 그 먼 곳이 실은 우리의 본래적인 진짜 자리였음을 알리고자 하는 가장 가까운 내 곁의 심리학이다.


이제는 '깨달음의 심리학'이라고도 부를 것이다.


나는 지금껏 그 말만을 하고 있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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