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마음 #28

"도덕자본"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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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이 지위다. 당연한 말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으면 자신이 특별해질 수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이것은 욕망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욕망은 단순하게 많이 갖기를 원한다는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욕망은 이처럼 남과 변별될 수 있는 자신이 되려는 방향으로 끝없이 작동한다.


어떻든 간에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을 창출하고자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대단하고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는 까닭이다.


원하는 것은 분명하나 그 방법만 몰라서 헤맬 뿐이다.


욕망이 끝없는 속성을 갖는 것은 미로 안을 영원히 헤매고 있어서다.


불가능한 방법으로 목표를 이루려고 계속 시도하고 있으니 방황은 욕망의 필수항목이다.


그러나 방황이라고 자각되기보다는 탐험이라고 간주된다.


마치 던젼 안을 탐험하며 보물상자를 모아가는 마법사인 것처럼 욕망에 빠진 이는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획득한 그 보물상자들이 자신의 자본이 되어줄 것이며, 자신의 지위를 한층 높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도는 관성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있으면서, 자기는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자유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가 이와 같다.


그렇게 수평적 차원에서의 회전운동을 계속 하고 있으면 수직적 높이가 높아질 것이라는 환상의 구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유명한 나선적 발달 개념의 출현이다. DNA도 나선모양으로 되어 있다느니, 피라미드의 숨겨진 파워도 나선형으로 작동한다느니 등과 같은 말과 함께, 단순히 같은 지점을 헤매고 있을 뿐인 그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언술들은 생겨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얻는 것은 단순한 합리화의 이득만은 아니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바로 '도덕자본'이 출현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보가 자본인 시절은 한창이었다. 어떻든 남들보다 낫기 위한 욕망을 달성하려면 자본을 많이 획득해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쪽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제 누구나 다 똑같은 '고급정보'를 공유한다. 비밀로 소수에게만 전수되었다고 하던 요리레시피는 더는 특권계급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민중 모두의 것이다. 다 같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서로 얼싸안고 축하한다.


해냈다. 우리도 이제 다 왕이다. 과거에는 왕 같은 상위계급이 자기들끼리만 소유하던 고급정보를 이제 우리도 소유할 수 있다. 길은 열렸다. 이제 내 자신도 정당한 한 사람의 왕으로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기다려라 세상아. 이제 새로운 왕이 간다. 나는 당당한 나만의 길을 간다.


그러나 그 현실은 어떠했는가.


누구나 다 똑같은 왕의 정보를 소유했으니, 이제 누구도 왕이 아니다.


누구나 다 똑같은 모습이 되었으니, 더는 당당한 나만의 길 같은 것은 주장할 수 없다.


무수히 깔린 복제품들이 저마다 자기도 오리지널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왕을 끌어내리는 현실이 의미하는 것은 자신도 왕이 되지 않는 현실이다.


그러나 실은 자기만 특별한 왕이 되고 싶은 욕망을 교묘하게 숨기며, 왕을 끌어내리고 다들 그 빈 자리에 자기가 왕으로 등극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모든 혁명은 늘 뱅글뱅글 도는 제자리걸음의 방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늘 내로남불이 된다.


자기는 말로는 왕을 부정해놓고, 자기만은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행위하는 일이 펼쳐진다.


말과 행위 사이에 완벽한 분열이 생긴 이것이 내로남불이다.


정보자본이 범람하고 있을 때 펼쳐지는 일을 떠올려보라. 자기는 쉽게 복사/붙여넣기를 통해 남이 고생해 이룬 것을 도둑질해서 자기의 이득으로 삼으면서, 자기의 것을 동일한 방식으로 빼앗기는 것은 어떻게든 막기 위해 온갖 방어장치를 설치한다. 자기는 남의 그림을 트레이싱해서 웹툰을 만들고, 누가 자기 웹툰을 캡쳐해서 게시하면 지적 재산권 위반으로 바로 고소하는 식이다.


내로남불이 드러내는 것은 이처럼 욕망의 민낯이다.


그 맨얼굴의 표정은 두 가지를 알린다.


자신만만한 척하지만 실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는 것이며, 그렇게 헤매고 있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또 새로운 거짓말을 이내 시작하리라는 것이다.


모두를 위해서라는 말로 위장해, 실은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의 이득으로만 삼으려던 그 의도가 이미 들켰지만, 한 번 시동을 건 욕망은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없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순간 '도덕자본'이 출현하기 좋은 조건이 마련된다.


자기가 내로남불을 시도하다가 들킨 그 수치심을 회피하기 위해, 또 그렇게 좌절된 자본획득의 욕망을 다시금 달성하기 위해, 이제 자기는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어 더 진정한 도덕을 이루고자 한다며 또 한 번 자기를 말로 지어내는 작업은 시작된다.


자기 자신을 말로 들어올려 수직적 높이를 억지로 갖추려는 일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선형 진화라고 말한다. 끝내 자기는 그 전까지의 방황을 교훈삼아 진정한 것으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이제 정보로는 타인과 자신을 변별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에 도달한 이가 그 변별을 궁리할 수 있는 거의 최후의 소재는 도덕인 까닭이다.


경제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탁월한 외모 등의 신체자원도 없으며, 정보의 보유량도 남들과 동일한 수준인 이가, 자신을 특별하게 지어내기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는 선하다."뿐이다.


모든 정신승리의 방식이 이러하다.


즉, 도덕은 다른 것으로는 자신이 남들보다 특별해지기 어려우니, 자기의 정신을 남들보다 위대한 것으로 승리하게 만들려는 소재다.


니체는 이 도덕을 통한 정신승리를 가장 병든 인간의 모습으로 평가했으나, 오늘날의 평가는 그 반대다.


다들 '나'를 이루겠다는 욕망은 멈출 줄을 모르는데 그 욕망을 이루어줄 자본은 충분히 증량되지를 못해 답답한 현실 속에서, 이 정신적 자원을 통해 욕망을 이루겠다는 정신승리의 발상은 오히려 마법적인 방법론으로 예찬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실이 막혀있을 때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것은 인간의 오랜 습성이다.


현실에서 자본을 갖는 일이 어려워질수록, 자본도 점점 추상화되어 이제는 도덕자본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자본으로 성립되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그것을 자본으로 인정하자고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도 도덕이 자본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이 이 동의를 적극적으로 이룬다. 그리고는 도덕으로 자기를 선전하는 이들에게 자원을 공급해줌으로써, 도덕이 자본이 되는 현실을 실제적으로 가시화시킨다. 오늘날 '선한 영향력'이라는 표현은 괜히 유행하는 것이 아니다.


못생겨도 도덕적이면 돈을 주고, 무식해도 도덕적이면 인기투표에 표를 던진다. 디즈니는 요즘 사람들의 이러한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또 도덕자본의 추구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데도 크게 일조한다.


누구나 이미 다 실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도덕자본을 추구하는 일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니체도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우리 삶의 생리를 속여야 한다. 실은 별로 끌리지 않는 분명한 느낌을 받지만, 자신은 그것을 좋아한다고 끊임없이 자기최면을 걸며 도덕자본의 소재를 지지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전형적으로 앎이 삶을 속이는 양상이다. 몸은 억압되며 점점 병들어간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자본이 추구되던 방식이 그러했듯이, 도덕자본 또한 남에게서 빼앗아 자기의 것을 증진시키려는 의도로 결국에는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자본이라는 표현 그대로 자기는 선한 정신이라는 것을 표방한 까닭에, 말과 행위 사이의 분열도 더욱 심화될 수밖에는 없다.


세 번째의 경우는 더 단순하고 핵심적이다. 아무리 도덕자본을 많이 취한 이라 할지라도 결코 '나'를 이룰 수는 없다.


이미 도덕자본의 추구 또한 세상에 범람해있다. 저마다 다 자기가 선한 이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는 심리학으로 위장한 자기계발서들에서는 모든 마음은 실은 다 선하다고 하는 소설까지도 써내려가고 있다.


어떻게든 다 자신의 모든 것을 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즉 도덕자본을 쟁취하기 위해, 다들 필사적인 것 같다.


그렇게 이 지구에 다 선한 사람들로 가득해지면 일어나게 될 일 또한 분명하다.


더는 선하다는 것에 아무 가치가 없어진다.


모두가 다 왕이 되면 왕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고, 모두가 다 같은 정보를 갖게 되면 그 정보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선의 인플레이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선(善)은 이제 휴지조각이다.


똥이나 닦는 일에 쓰면 마침내 선(禪)이 출현한다.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것이, 억지의 나선운동이 멈춘 자리에서야 비로소 발견된 것이다.


그 나선의 산꼭대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그래서 똥이나 싼 뒤 휴지로 닦고 내려왔다.


똥이나 싸러 올라갔던 것이다.


내려온 마음은 시원했다.


틸리히는 수직운동이 '위'가 아니라 '아래'라고 말한다. 그는 왜 그토록 땅(ground)이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라고 강조하는가.


그게 '나'라서다.


나는 자본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자본을 통해 달성된 욕망의 끝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욕망이 지향하던 분명 그 자리이지만, 그것은 욕망의 끝에 있지 않다. 오히려 욕망이 시작된 바로 그 지점이다.


자신의 얼굴을 알고 싶어 떠난 인간이, 욕망의 대상들을 얻어갈수록 자신의 얼굴을 알게 될 것이라 꿈꾸며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 동일한 자리를 뱅글뱅글 도는 제자리운동이었던 것은 실은 출발한 그 자리가 '나'인 그 자리임을 알고 있었음이라.


잉여재산이 많아야 나일 수 있고, 잘생겨야 나일 수 있고, 많이 알아야 나일 수 있고, 도덕적이어야 나일 수 있다니, 나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어야 한단 말인가, 바로 이 직관과 함께 우리는 실은 욕망의 운동에 저항하고 있던 것과도 같다.


욕망의 속성은 언제나 추구되며 동시에 저항된다.


그러니 늘 팽팽하게 맞선 줄다리기처럼 제자리다.


그렇다면 왜 힘을 들여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가?


줄을 놓고 그냥 그 제자리에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피식, 하는 그 어느 웃음의 순간이 선(禪)이다.


제 자리다. 힘도 들이지 않고 조건없이 제 자리다.


이것이 나의 자리라는 것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조건없이 앉을 수 있는 내 자리도 존재해도 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이렇게 길게 돌어왔다.


나는 살아도 되었던 것이다.


욕망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삶의 지속을 꿈꾸는 것이 욕망이라고 할 때, 이 삶의 승인만큼 욕망이 완벽히 달성될 수 있는 방식이 또 있을까.


욕망은 어떠한 형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져도 된다는 그 승인을 만날 때 이루어진다.


너는 살아도 된다.


우리가 이 말을 매일 듣고 산다면, 선은 그런 현실과 같다, 자본 같은 것을 굳이 쟁취할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똥을 싸고 닦을 휴지 정도면 된다. 도덕자본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선(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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