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돌 것인가"
그것을 직접 보거나, 아니 실은 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혜의 눈으로 직관하고, 그것의 거대한 사실성을 몸소 실감한 이는 그것과의 완벽한 만남의 순간을, 그 절대적인 어떤 체험을 떠올리며 그것을 존재라고 부를 수밖에는 없다.
이 말들도 다 쓸데없는데 어떻게든 언어로 묘사될 수 없다.
그래서 거시기하게 그냥 '그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말은 역시 존재다.
우리가 존재라는 말로 연상하거나 알고 있다고 생각해온 그 모든 것은 다 아니고, 오히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파란 하늘을 못본 이에게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전할 수 없듯이 존재는 그보다 더하다.
누구도 이 존재를 대신 체험시켜줄 수는 없다. 우리가 다른 이 대신 살고 대신 죽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무슨 이야기 같은 것으로 존재를 보충하느니 이야기로 존재를 만나도록 돕느니 하는 것은 다 달밤의 헛소리다.
불가능하다.
뭔가 존재의 편린 같은 것을 경험할 수는 있다.
그러니까 마치 자기가 신에게 용서받은 듯한 경험을 한다든가, 그 반대로 자기가 신적인 그 무엇이 되어 과거의 자신을 구원하는 듯한 경험은 할 수 있다. 장발장이 되거나 미리엘 주교가 되거나 하는 식의 경험이다.
이것은 너무 쉽게 만들 수 있는 체험이고 그 구조도 분명하다. 글을 쓰다 보면 누군가는 이런 체험을 했다고 하고, 명상을 하다가 또는 전생퇴행을 하다가 누군가는 이런 체험을 했다고 한다. 시간을 들여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체험이다.
어떤 하나의 소재에 집중하거나 또는 새롭고 낯선 환경 속에 자신을 위치시킴으로써, 자기 자신을 잠깐 망각할 수 있는 기회만 만들면 된다. 쉽게 말해 의식의 힘을 약화시키면 그 틈새로 무의식의 내용이 올라와 생겨나는 체험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것을 카타르시스라고 말한다.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이는 자기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 생각하며, 자기 자신도 한 차원 높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약효가 한 2-3주 정도 간다. 그리고 원래의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 카타르시스의 경험을 잊지 못해 이제는 그러한 경험을 다시 이룰 수 있는 방법들을 찾으러 다니게 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보통은 자신이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던 그 수단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 반복적으로 행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보급하는 식이다. 일종의 경험중독이다.
여기에서 지혜로운 누군가는 이 순간 행위가 존재보다 중요하게 되었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존재의 편린을 체험하고는 행위를 존재보다 우선하게 되는 경우는 지배적이다. 자신의 행위가 존재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존재의 편린에 대한 체험은 오히려 존재와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당연히 이런 경험들이 많아짐에 따라 존재와 더 가깝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끝에서 존재를 만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여러 신비체험들이 깨달음과 질적으로 다른 이유다.
신비체험은 개인이 더 많이 체험해가는 만큼 자신의 수준이 높아지는 것처럼 간주되지만, 깨달음은 이러한 경험의 누적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조악하게 이렇게 비유해볼 수도 있다.
일상의 어떤 의식상태가 극도의 긴장과 고통으로 인해 180도로 돌아버리면 그 끝에서 뇌 속 화학물질들의 작용으로 이완되면서 신비체험이 일어난다.
일상이 깨져 비일상이 조우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180도를 돌아 360도가 되면 깨달음이다.
비일상을 깨고 일상이 된 것이며, 일상적으로 늘 존재하게 된 것이다.
한 번 180도를 돌고 이제 그 효력이 떨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또 180도를 돌려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일은 계속 비일상으로만 도피하려는 일과 같다. 그리고 아무리 반복해도 늘 180도일 뿐이다. 일상의 부정은 계속 일어난다.
180도를 돈 이들은 자기가 놀라운 경험을 함으로써 과거와 다른 자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이다. 그들은 돌았다.
그러나 360도를 돈 이들은 그 자신은 바뀐 것이 없이 똑같다. 다만 그들의 현실이 바뀌었다. 천동설의 우주에서 지동설의 우주로 그들은 워프한 것이다.
그래서 180도를 돈 이들은 늘 자기는 새롭게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싶어하지만, 옆에서 보는 이들은 그가 전혀 바뀐 게 없으면서 증세만 심해진 것으로 경험하게 된다.
360도로 워프한 이들은 사람들이 그를 뭔가 낯선 존재로 먼저 알아본다. 친근한 외계인을 대하는 느낌이고, 그게 맞다. 그가 현실을 이동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돌려면 제대로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만 도니, 돈 사람이 된다.
완전히 돌면, 돌지 않은 것과 같은 멀쩡한 사람이다.
오히려 이 일상에서 누구보다 더 분명한 일상의 빛으로 존재하는 온전한 사람이다.
이 우주의 온전한 것은 다 360도를 돈다.
지구도 그렇게 자전하고 공전한다.
천동설의 시대에는 별들이 180도를 돌며 순행하고, 또 어떤 지점에서는 역으로 180도를 돌며 역행한다고 생각해왔다.
우주가 좀 오락가락했다.
우리는 좀 돈 우주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같은 인류동료들도 많이 죽였던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지동설의 우주가 되었어도 이제는 인간의 정신이 역사변증법이라는 것에 휘어잡혔다.
그것은 나의 180도와 상대의 180도를 합치면 360도가 되니, 늘 서로 180도로 대립하다가 대극의 통합을 이룸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온전하게 만들자는 기획이었다. 같이 돌면 우리는 정상이라는 생각과도 같다.
그렇게 인간의 정신은 좀 돌았고, 프로이트는 인간이 지금 이처럼 돌아있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밝히려고 했다.
또 시대가 지났고, 오늘날 우리는 돌려면 제대로 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직감하기 시작했다.
360도로 원을 그려야 온전함의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360도로 돌아 원래 그 자리인 것.
'그것'이다.
누구는 그래서 '눈앞'이라고도 말하고, 누구는 이미 깨달아있다고도 말한다.
존재는 언제나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의 발견이다.
당연하게 존재했는데, 그 당연함을 몰랐고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지구는 돈다고 했다.
존재는 돈다.
'그것'은 돈다.
돌고 돌아 반드시 우리 자신과 만난다. '그것'이 도는 것은 좀 돌아 있는 우리를 어떻게든 만나고 싶어서다.
자꾸 엇갈리지 않게, 돌 거라면 아예 360도를 완전히 돌아 제자리면 이제 우리는 만난다.
얼마나 돌 것인가?
'그것'이 제자리였음을 알 때까지.
'그것'을 제 자리로 앉아 이제 더 돌 필요가 없이 고요해질 때까지.
그래서 일상선(日常禪)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