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마음 #30

"실존선언"

by 깨닫는마음씨


1080x1920-322901-Anime-Sky-Lantern-Cat-Night-Scenery-4K-iphone-wallpaper.jpg?type=w1600



인간의 본성에 대해 자꾸만 안다고 했던 이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하며 교육으로 그것을 선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하며 자상한 시선으로 그 감춰진 선함을 알아봐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들은 통합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하며 다 온전하게 사회적 선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다 같은 얘기였다.


결론적으로 어떻게든 다 작위적인 선함을 만들려고 하는 조작적 시도였을 뿐이다.


이 시도를 윤리라고 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해 자기 자신이 불안하고 두려우니까, 허구의 이야기로 인간을 규정하여 어떤 틀 안에 넣음으로써 자기의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


자기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다른 모든 이를 감옥에 가두려고 하던, 진짜 정신나간 발상이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가 자기가 죄수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감옥에 갇혀 있게 하기 위해, 이 죄수에게는 특별한 이름이 부여되곤 했다.


착한 아이.


이것이 오늘날 죄수들의 이름이다.


죄수들의 일은 감옥 안에서 스토리텔링에 열중하는 것이다.


이야기로 당당한 자신을 만들어간다며 열심히 자신의 서사정체성을 세우고자 한다.


이것은 마치 강대한 세력에게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도 소중한 역사과 근본이 있는 민족이라고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어떤 신화를 창작하려는 일과 같다.


신화는 어떤 기능을 하는가?


바로 윤리다.


신들의 권위로 집행되어야 할 어떤 드높은 윤리적인 교훈을 전하는 서사가 바로 신화다.


오늘날 유행하는 서사정체성은 쉽게 말해 '개인의 신화' 만들기다.


실은 이것은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청소년기의 특징인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 및 '상상의 청중(imaginary audience)'의 개념과 연결된다.


청소년기의 개인은 어떤 카메라가 자기를 늘 찍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자기를 아주 특별한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간주하곤 한다. 카메라 뒤편에 있는 것은 물론 트루먼쇼처럼 자기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청중이다. 그 규모는 거의 지구촌급이다. 말 그대로 슈퍼스타인 것이다.


이것이 아마 거의 최초의 서사정체성일 수 있다.


서사정체성의 특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범을 내재화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부모가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제정한 규범 속에서 키워온 아이라면 이 슈퍼스타로서의 서사정체성이 만들어지는 일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자아중심성의 바탕 위에서, 청소년기의 개인은 친구와 학교 또 다른 어른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점차 자신의 서사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마치 타인에게 공감하고 타인을 향해 친절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발달시킴으로써 자아중심성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일은 그러나 그저 자아중심성의 확장에 불과할 뿐이다.


쉽게 말해, 이것은 마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과도 같은 일이다. 스토리가 길어지고, 부록과 외전이 늘어날 뿐이지, 그 핵심인 슈퍼스타의 자아중심적 서사가 사라지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교묘히 은폐되어 그 세력을 더욱 왕성히 키워간다.


바로 윤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윤리를 강조하는 이들은 자기가 실은 슈퍼스타라고 주장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내가 슈퍼킹왕짱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이들은 그 말 대신에 전략적 판단으로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이제 제가 듣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남들이 진정한 슈퍼스타[슈퍼히어로]로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 슈퍼스타 워너비들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는 '착한 아이'라는 신화를 완성하기 위해 열심히 집필활동에 매진한다.


감옥 안에서.


자기에게 바로 그 '착한 아이'라는 것이 규범으로 강요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않은 채, 자기가 쓴 신화를 통해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감옥의 어둠은 깊어만 간다.


근대가 '보편적 신화'의 종말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다면 우리는 '개인의 신화'의 끝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배워볼 수 있으리라. 문제는 '보편'이냐 '개인'이냐가 아니라 바로 '신화'에 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서사를 만들어 스스로를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시키려 하는 오만성의 문제다.


모두를 다 같이 신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허울좋은 윤리를 표방한다고 그 오만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오만성이 특히나 문제가 되는 것은 유치함 때문이다. 유치한데 오만하면 사람이 아주 고집스러워진다.


자기의 삶은 자기만의 특별한 이야기라는 착각에 입각하여, 자기에 대해서는 자기가 제일 잘 안다는 식으로 세상 다 산 대현자인 척 구는 어설픈 사춘기적 추태만을 부리게 된다. '젋은 꼰대'의 출현이기도 할 것이다.


더 쉬운 말로는 발달미숙, 나아가서는 발달장애라고 부른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 누구나 다 이 발달의 문제를 겪게 된다.


그렇게 자기가 미숙하다고 실은 직감하는 만큼, 슈퍼스타의 꿈도 커진다.


게임아이템처럼 여러 특별한 이야기들을 덕지덕지 자기에게 붙여가며 자기의 서사정체성을 확장하는 일만이 인생의 유일한 과업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특별한 이야기로 무장하려는 이들을 보통 힙스터라고 명명한다. 자기만의 서사정체성을 만드는 일에 중독처럼 몰두해있는 이들이다. 제일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사실 다 알아."


이렇게 착한 아이들은 감옥 안에서 똑같은 주문만을 왼다. 똑똑함이라는 속성은 학력사회에서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까닭이다.


그런데 다 아는데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잘 안풀릴까. 그들도 그게 이상할 것이다.


실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특별한 '착한 아이'라고 자기의 본성을 아는 척하고 있기에, 그렇게 규정되어진 바대로 스스로도 규정하고 있기에, 실은 모르게 된 것이다.


오만성의 최대의 문제는 이처럼 인간이 자기의 본성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모른다.


'모름'이다.


누구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 수 없기에, 그것에 순수하게 대답하려고 일어선 인간이 있다. 그 인간의 탐구가 있다. 인간이 걸어간 길이 있다.


그것을 삶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활동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대답하려고 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삶은 끝이 없다. 인간이 인간 자신의 본성을 어떤 방식으로 규정하려고 하면, 그 즉시 인간은 그 자리에서 슬금슬금 미끄러져 빠져나간다. 모든 정답은 이 인간이라는 미지 앞에서 다 기각된다.


그때야 우리는 눈치채게 된다.


인간이야말로 진정 이 우주에서 규정될 수 없는 가장 거대한 신비라는 것을.


여기에서 착각은 깨어진다.


내가 아는 만큼 존재하게 되고 또 존재가 증대된다는 착각.


내가 이야기를 만드는 만큼 존재하게 되고 또 이야기를 통해 존재가 증대된다는 착각.


이것들이 깨어진 자리에서 사실은 선명해진다.


내 존재는 언제나 내 앎보다 컸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컸다.


우리가 알아야 할 유일한 것은 어쩌면 이것밖에 없었으리라.


이것을 분명히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이제 윤리적 앎의 이야기가 만든 죄인의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리는 감옥 안의 '착한 아이'여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 밖에서 우리는 정말로 존재한다.


그렇게 이미 존재하고 있는 우리는 자유다.


인간은 그 어떤 위대한 이야기로도 포획할 수 없는 모름 그 자체였고, 모름은 바로 자유였다.


모름의 자유다.


그래서 복음이 들려온다.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내려주리니, 너희는 서로 자유하라.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이것이 실존선언(實存禪言)이다.


실존이라는 인간의 미지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선(禪)의 말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우리는 모르고, 그렇기에 인간은 영원히 자유롭다는 그 신성한 선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먼 곳에서 온 마음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