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에서 온 마음 #31

"심리학은 어떻게 디즈니랜드가 되었나"

by 깨닫는마음씨




오늘날 심리학이 처한 운명에 대해 말하고 싶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동들의 디즈니랜드.


이것은 물론 심리학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인문학이 겪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유튜브에서 10분으로 요약해준 니체 철학의 얘기를 듣고는 자기가 니체 철학에 대해 좀 아는 척하는 이들도 많고, 또 그런 이들을 위해 일부러 니체 철학을 왜곡시켜 어떻게든 10분으로 짜맞춘 영상을 만들어내는 이들도 많다.


그중에 누구도 니체를 모르지만, 자신들은 다 이제 니체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자기도 철학공부를 어느 정도 한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과거에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무식한 시대에는 쓸데없이 30년간 니체의 원전들을 읽고 앉아있는 어리석은 일을 했지만, 이제는 유튜브와 나무위키라는 놀라운 기술의 도움을 얻어 가장 핵심적인 것만을 선별적으로 통합해 30분만에 니체 철학을 정복하는 일이 진심으로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이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그 무식한 야만성이 하늘을 찌르는 아동들이다.


이들은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체를 모른다.


모든 것을 다 정보획득의 문제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AI처럼 사는 아동들이다.


최대한 많은 양의 고급정보를 단시간에 얻는 일만이 이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위버멘쉬' '아모르 파티' '디오니소스적 도취' 등의 정보를 쉬운 방식으로 모아가는 정보처리의 일만을 이 아동들은 지속하며, 그렇게 철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일이 곧 철학이라고 완벽하게 착각한다.


그러니 이러한 아동들에게 과거의 철학자들은 마치 현대에는 컴퓨터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주판을 두들기고 있던 멍청한 이들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철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정보를 획득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정보를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해 저장하는가의 그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정보처리의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문제다.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현실에서, 새롭게 눈을 떠서 오히려 지구가 돌고 있는 그 현실로 어떻게 진입해갈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모든 과학이 이렇다.


내가 얼마나 이런 것도 알고 있는 대단하고 특별한 정보처리기계인지를 자랑하고 선전하기 위해 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다. 내 자신이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싶어서 인간이 해나간 활동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한 지향성도 있다.


사실을 향해서.


더욱 사실성에 가까운 지점을 향해서.


과거에는 진리라고 표명되어온 바로 그 사실성에 인간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 더욱 사실적으로 이 현실을 이해하고 싶어서 과학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동들의 디즈니랜드에서는 다른 지향성이 선포된다.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날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추락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은 추락하는 것들의 왕이다.


이 시대의 심리학은 어느 과학분야보다도 거의 전적으로 아이들을 위한 봉사재로서의 그 무엇이 되어 있다.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심리학인 것처럼 착각될 정도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해요."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의 현실을 드러내려는 과학적 의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 말이 마치 심리학의 대표적인 슬로건인 것처럼 행사된다.


양육술이 되어버린 심리학의 영락한 모습이다.


이것은 세 가지의 형태로 일어난다.


첫 번째는, 실제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법을 가르치려는 윤리적 교육의 형태다.


두 번째는, 내담자를 아이처럼 보며 친절하게 그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심리상담활동의 형태다.


세 번째는,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아이들과 같고 우리는 그 아이들을 지켜보고 돌봐주는 '나'로 살아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심리구조의 형태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형태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을 이야기로 간주하는 일이다.


이야기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문자언어로 기록된 정보다. 음성으로 발화한다 해도 이야기는 문자언어다. 그것은 기록된 어떤 정보가 변함없이 항구적으로 지속될 것이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불안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조건에 대해, 이 조건을 무시하고 회피하기 위해 '가짜 안정'을 추구하며 만들어진 것이 그래서 이야기다. 그러니 이야기에 입각해 사는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잃게 된다.


이처럼 자기의 존재를 상실한 이들이, 자기의 존재 대신에 그 자리에 세우는 것이 또한 이야기다. 이런 것을 서사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로 만든 '가짜 나'와 같다.


서사정체성은 자기가 경험한 마음작용들 중 인상적인 것 몇 개를 추려 '글감'으로 삼은 뒤 그것들을 임의적으로 재배치함으로써 특별하고 남달라보이는 '개인의 신화'를 만들어내고는, 그 이야기를 산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내세우는 일이다.


때문에 서사정체성은 근본적으로 '편집'의 결과다.


더 쉽게 이해해보자.


50년을 산 어떤 개인이 있다. 그는 1시간 30분 정도의 영화로 상영될 만한 이야기를 만들고는 그것을 '나'라고 부르는 서사정체성을 구성했다.


그가 실제로 하게 된 일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해 만들어낸 1시간 30분 외의 그 모든 삶의 시간은 다 편집해서 내다버린 것이다.


그는 사실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막대하게 상실했다.


그 시간을 살고 있던 자신의 존재를 아주 심대하게 상실했다.


이러한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존재의 상실만이 서사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서사정체성은 그 개인의 삶에 '문제'를 계속 만든다는 것이다.


왜인지는 아주 단순하다.


갈등이 없는 이야기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있어야 이야기로 성립될 수 있다. 주인공은 어떠한 갈등을 해결함으로써 성장한 주체가 된다. 모든 이야기는 다 이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 영웅신화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러니 역으로 말해, 어떠한 이야기로 사는 이는 그 이야기를 지속하고자 하는 한 끝없이 갈등의 문제를 경험할 수밖에는 없다.


서사정체성은 무슨 자기가 좋은 것만 통합적으로 선별해서 취할 수 있는 '공짜마법'이 아니다.


엄청난 대가가 따른다.


인생이 절망적으로 피곤해진다.


영웅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책이나 영화로 볼 때나 재미있는 것이지, 우리가 맨날 팔다리가 잘려나가며 무서운 용과 싸워야 하는 일을 직접 해야 한다면, 진실로 그런 삶이 행복하게 느껴질 것인가?


서사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일은 우리의 인생에 가장 큰 고통을 가져오는 지름길이다.


그러니 다들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서사정체성을 쓰고 그걸 남들에게 선전하며 살아가던 이들이, 초기에는 어떤 마법적 이득을 얻는 것처럼 경험하다가도 이내 절망과 권태에 빠져 마약이나 빨고,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거나, 아니면 자기만 고통받느니 다른 이들도 같이 지옥에 빠지게 하려고 사기행각이나 일삼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잊기 위해 이루는 활동들이다.


오늘날 심리학은 불행하다.


인간 영혼의 고통을 치유하겠다고 출발했던 심리학이, 이처럼 오히려 인간을 더 고통받게 하는 일에 일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심리상담의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문예창작과 학부를 졸업한 이가, 소설은 안쓰고, 자기 인생을 소설로 날조한다. 최면 같은 내러티브 활동만 평생 하던 이가 십수 년 경력의 심리상담자라고 선전하는 식으로 대개 이 일은 이루어진다.


그리고는 이 인생날조의 방법을 심리학이라고 말한다.


내가 이루고 싶은 어떤 욕망이 있으면 '이미 그것을 이룬 모습의 나'에 대한 이야기를 써서 그것이 실제로 될 수 있는 마법이 심리학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소위 말해 '시크릿'이 심리학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또 그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열심히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든 마음은 나쁜 마음이 아니라 다 '착한 아이'와 같은 좋은 마음이기에, 그 착한 아이들의 말을 자상하게 들어주고, 착한 아이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도록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인자한 부모처럼 그 소망을 이루어주는 것이라고 이 방법론은 묘사된다.


문예창작과에서 하는 작문활동이 어느새 또 심리학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처럼 실상 심리학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이 기만자들을 대단한 심리상담자처럼 보며 찾는 이들은 이 시대에 많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실은 야합이다.


심리학이 이런 마법이었으면 좋겠다는 디즈니랜드 아동들의 야합이다.


한 아동이 디즈니랜드 상담실에 입장한다.


자기가 쓴 서사정체성의 소설을 들고는.


미키마우스는 "당신의 소중한 이야기를 이제 제가 듣겠습니다."라고는 자상한 미소를 띠며 아동의 소설을 경청한다.


그리고는 그 소설이 기본적으로 얼마나 잘 쓴 소설인지에 대한 칭찬과 함께, 살짝 보완해야 할 점들을 함께 살펴보며 소설의 편집작업을 해나간다.


그렇게 미키마우스는 소설쓰기의 스승이 되어, 하나의 서사정체성을 강화해주거나, 또는 더 나은 대안적 서사정체성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는 일에 조력한다.


디즈니랜드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은 이처럼 문예창작과 수업이다.


그리고는 거기에 심리상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요즘 애들이 심리학을 좋아해서다. 심리학이라고 하면 그들의 기분이 좋아져서다.


미키마우스는 오늘날 심리학은 커녕 소설 한 편도 쓴 적이 없지만, 아이들의 기분을 맞추어주며 문예창작과 선생으로 행세할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은 소설 한 편 쓴 적이 없는 이에게 소설쓰기 과외지도를 받는다.


오직 미키마우스에게 자기가 쓴 서사정체성의 소설을 칭찬받으려고만 가슴이 부푼 채 디즈니랜드 상담실에 입장한다.


나는 여기에서 더 최악의 장면도 묘사할 수 있다.


다 미키마우스다.


유튜브나 나무위키로, 또 TV에 나오는 정신과의사의 말들을 통해, 심리학에 대한 아주 피상적이고 얕은 정보들을 수집한 이들이, 이제는 다 자기가 한따까리 하는 심리학 선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오늘날이다.


어디 어플로 사람들을 모아 진행하는 심리학 모임 같은 데를 나가보라.


개판이다. 아니 잘못 말했다.


쥐판이다.


다들 자기가 누군가를 상담하려고 하고, 심리학 전문가 코스프레를 하는 일에 여념이 없다. 자기도 유튜브 전문심리학 채널에서 아들러를 공부했고, 정신분석도 깊이 배웠고, 융도 유치한 MBTI가 아니라 전문적인 인텐시브 코스로 체화했고, 내면가족체계도 알고 있고, 알프레드 비욘의 현대정신분석도 이제 영상을 보기 시작해 한 7분 정도 봐서 절반은 마스터했다며, 자랑스러운 얼굴로 미소짓는다.


쥐구멍을 찾아야 하는 것은 내 몫인가?


그렇지 않은가.


미키마우스들이 이제 당당하게 그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햇살 아래로 나와 있다면, 오히려 쥐구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은 진짜 전문가들이 아닐 것인가.


디즈니랜드의 아동들과 야합해서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어야만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시절이라면, 나는 전문가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련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것이다.


그래도 마음은 돈다고.


백날 서사정체성을 만들어서 마음을 아는 척, 마음을 알아주는 나인 척, 내가 내 마음은 제일 잘 아는 척해봤자, 그렇게 마음을 감옥에 가두어 정체시키려고 해봤자, 마음은 돈다.


서사란 무엇인가?


이야기로 시간을 가둔 것이다.


이 시간감금의 구조가 서사다.


그리고 서사는 자기가 시간인 척한다.


서사가 있어야 사건이 전개되어 우리 인생의 시간이 흘러가는 척한다.


우리의 시간이 제대로 잘 흘러갈 수 있게 하는 권위가 서사에게 있는 척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서사를 만들어 비로소 자기의 인생을 흘러가게 했다고 감격스러워하기도 한다. 자기가 시간을 지배하는 왕으로 등극했음을 자축하는 액션이다.


백날 그러고 있는 동안, 어쩌면 백날도 되지 않아 우리는 죽는다.


이야기로 시간을 가두어보려 해도, 죽음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와 알린다.


우리는 시간을 가둘 수 없다고.


이 말을 다시 하면 이렇다.


우리는 마음을 가둘 수 없다.


마음은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은 서사구조가 아니다. 당연히 실제의 마음과 서사정체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실존주의에서는 말한다.


마음은 이야기에 선행한다고, 우리는 동일한 의미로 말할 수 있다.


마음은 이야기로 결코 포착될 수 없는 우리의 언어적 인식 이전의 것이다.


이야기가 없는 순수체험, 그렇다면 그것이 마음이다. 이것은 현상학이다.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이야기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로 만들 수도 없고, 가감할 수도 없으며,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소위 전문용어로 '좆됐다'라고 하는 모든 사건은 이야기로 마음을 이끌려고 해서 생겨났다. 이야기로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그 심대한 착각 때문에 인류의 모든 비극은 야기되었다. 이것에 대한 비유가 바로 바벨탑의 우화다.


또한 선(禪)에서는 깨달으려면 왜 모든 이야기를 갖다버리라고 말하는가?


선이 곧 본래마음의 순수체험이기 때문이다.


선사들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여러 복합적인 대극의 이야기들을 동시에 보는 이들이 아니다.


모든 이야기를 쥐똥으로 보는 것이 선사다.


그러면 선사는 무엇을 보는가.


사실을 본다.


이야기의 감옥에 갇혀 있는 존재의 사실을 꿰뚫어 본다.


그것은 쥐똥의 주인이 미키마우스라고 알아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럴리가 없다.


왜 사람으로 태어나 쥐똥을 싸고는 그것을 양손으로 받쳐든 채 숭배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냐고 되묻는 것이다.


선사는 시간을 사는 마음, 그것이 곧 사람이라는 그 사실만을 알아본다.


사람은 어떤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사람은 아니다.


우리는 요리조리 사람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사람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들을 그려볼 수는 있지만, 사람은 언제나 그 모든 이야기의 크기를 초월한다.


그렇다고 그 모든 이야기를 다 합한 것이 사람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단순히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순수하게 체험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에 대한 이 순수체험을 바로 나라고 부른다.


다시 강조하고 싶다.


사람에 대한 순수체험을 나라고 부른다.


이 '나'의 발견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우리는 감히 짐작하기도 힘들다.


얼마나 인류가 나를 향해 한 길로 앙망하며 간절히 몸부림쳐왔던지, 그 기나긴 여정과 시행착오의 끝에서, 이제야 비로소 나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게 된 그 역사는 오직 눈물로만 가득하다.


그래서 스즈키 선사는 말했던 것이다.


"모든 깨달음의 안에는 눈물이 있다."라고.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나를 외쳐봐!"와 같은 식의 서사정체성으로 만들어진 '가짜 나'를 우상으로 세우려는 수많은 말들 때문에 얼마나 긴 시간 인간이 더욱 표류하고 더 많이 상처입으며 헤매왔던지의 그 곡절도 아주 절절하다.


나의 발견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보다 더 거대한 전환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실로의 전환이다.


심리학은 분명 어느 순간까지는 이 새로운 현실을 향한 운동의 선두에 서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변화일수록 그것을 불안으로 경험하는 세력은 더욱 클 수 있다.


특히 불안을 나쁜 것으로 여기며 이야기를 통해 거짓의 안정을 지속하고자 했던 근대시민국가와 그 사회제도는 이 변화를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효과적인 방법을 기획했다.


그것은 가장 새로운 현실을 노래하던 심리학을, 가장 낡은 현실의 지지자로 탈바꿈시키는 전략이었다.


심리학의 대중화, 이것은 근대시민국가가 가진 최고의 무기인 미디어에 의해 신속하게 시도되었고, 그 효과는 탁월했다.


심리학은 고작해야 아이들 기분이나 맞추어주는 양육술로 아주 빠르게 영락해갔다.


미지의 우주로 막 떠나고자 하는 우주비행사를 집에서 아이 분유나 타주라며 주저앉힌 것이다.


그리고는 오히려 역으로 뜨겁게 외친다.


아이들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라며.


그렇지 않다는 것은 80억으로 불어난 이 지구촌 부락의 과밀도 상태가 증거한다.


아이들이 미래인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미래를 전해야 한다.


아이들이 자유롭게 또 안심하며 살 수 있는 미래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더 많은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을 타는 대신에 분유를 타고 있으면 만들어지는 현실이 아니다.


심지어 어떤 우주비행사들은 애초 가족을 만들지 않고, 자기의 DNA를 남기는 일을 기꺼이 포기한 채, 인류에게 전해질 수 있는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고자 우주를 향하던 참이었다.


그렇다면 남의 아이에게 분유를 타주고 있어야 하는 그 일이, 또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기분이 맞춤형으로 좋아지는 맛있는 분유를 탈 수 있는지를 TV 앞에서 강연하는 그 일이 꼭 우주비행사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을까?


오늘날 심리학이 이러한 상황 속에 있다.


심리학에서 나를 향한 큰 뜻을 보았던 이들은 다들 가공의 디즈니랜드에서 알바나 하는 신세다. 미키마우스 인형탈이나 뒤집어 쓴 채, 더 친절한 생쥐의 미소를 연습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미키마우스 탈을 쓴 아동들에게, 내가 더 심리학 전문가네, 라는 조롱과 멸시나 받으며 천대된다.


심리학의 원점을 생각해보면 분명하다.


심리학은 인간의 표면적 행동 이면에 있는 어떤 비가시적 사실을 발견하고자 성립된 일이었다.


보이기로는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가 얼마나 교묘한 독재자였는지, 또 그 독재자는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착각 때문에 반복적으로 자신이 먼저 배신하는 행위를 지속하던 어떤 미아였는지 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심리학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벗겨내면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사실이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이를테면 유치원에서 배웠어야 할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그 무수한 이야기들로 도주해오던 환상의 궤적이 있었고, 그렇게 면피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나'의 서사정체성이 있었던 것이다.


스즈키 선사와 에리히 프롬이 함께 집필한 『선과 정신분석』에서는 선불교와 심리치료가 공유하는 목적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허위의 이야기들을 벗겨내고 정직하게 사실을 조우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심리학은 거꾸로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 서사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일에 봉사하는 도구가 되어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야기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어떠한 이야기로 보는 방식을 학습시키는 일에도 심리학은 자주 남용된다.


마치 한 개인이 '나쁜 이야기'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는 형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그 대안으로서 곧바로 그를 위한 '좋은 이야기'라는 이름의 감옥 안에 수감시키는 일은 아주 적극적으로 펼쳐진다.


이것은 심리상담이 아니라 최면이다.


최면과 세뇌는 근대시민국가의 전형적인 관리수단이며, 미디어가 왜 근대시민국가의 최고의 도구인지에 대한 그 이유다. 이 지점에 대한 설명은 푸코 같은 이가 이미 넘치도록 아주 섬세하고 집요하게 묘사한 바가 있다.


최면과 세뇌는 어떤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이야기 자체가 지속되도록 하기 위해 집행되는 활동이다.


A라는 이야기에서 B라는 이야기로, 또 B라는 이야기에서 C라는 이야기로 이어지는, 이야기로 당하는 조리돌림이다. 끝없이 인간존재가 소외되는 왕따(bulling)의 현실과도 같다.


자기의 이야기에 빠진 아동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현실이다.


이러한 아동들은 자기의 이야기만 생각하고, 남의 이야기는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에 소외의 폭력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착각이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갈등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의 구조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비극이다.


이야기에는 반드시 '적'이 있어야 한다.


남의 이야기는 자기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반드시 잠정적인 적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적당히 서로가 이야기를 펼칠 때는 갈등이 없다. 하하호호 하며 웃음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서로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더 깊게 펼치려고 하면 거기에는 상대와 필히 충돌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야기는 문자언어의 속성과 같이 '저장되어 축적된 것', 즉 자본인 까닭이다. 그러니 누가 자본을 쟁취하는가의 갈등은 필연이다.


이런 것을 담론게임이라고 한다. 이야기는 원래가 권력의 소재다. 아무리 평화롭고 착한 척해도, 이야기는 자기 자신의 증대를 위해 상대를 쓰러트리고자 하는 권력의 의지를 반드시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권력의 갈등이 불편한 이들은 서로간에 깊게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요즘 유행하는 '넓고 얕은'의 풍조가 만들어진 이유다.


이처럼 서사정체성의 이야기로 살고 있으면 충돌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운명과 같으니, 어떻게든 그 운명을 피해보려고 우리는 타인과 피상적으로만 접촉하려는 행동양식을 발달시킨다. 그러면서 외롭다고 경험한다. 아무도 자기의 이야기를 이해해주지 않아 외롭다고 하는 착각은 덤이다.


그러나 사실은, 누가 자기의 이야기를 알아주지 않아 외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야기라는 것을 만들어내고 있어서 외로운 것이다.


그러다가 이 이야기에 빠진 아동들이 꿈꾸어내곤 하는 궁극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자기의 이야기와 남의 이야기가 깊이 있게 교류되면서도 서로 존중하며 공존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지는 어떤 현실에 대한 꿈이다.


이로써 유토피아의 꿈이 출현한다. 그런 곳을 바로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곳을, 특히 이야기의 구조상 더욱더 불가능한 곳을, 아동들은 꿈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치명적으로 이제, 자기를 위해 이 유토피아를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심리상담자들에게 떠넘긴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디즈니랜드로 돌아온다.


자기는 굳이 상담자를 존중할 필요가 없지만, 상담자는 절대적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상담자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규정된, 이 매서운 소외의 폭력이 디즈니랜드 곳곳에서 자행된다. 흡사 유태인 홀로코스트를 방불하듯이.


상담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그 이야기를 해체하려고까지 한다면, 유토피아의 아동들은 부들부들 떤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 네가 감히 나에게! 고작해야 상담자 따위에게 모욕받은 이 거룩한 천사들은 이제 상담자를 심판할 준비를 한다. 얼마나 상담자가 반민주적이고 권력적이며 독재하는지를 순결한 피해자의 얼굴로 호소한다.


근대시민국가가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그 모든 언어로 상담자는 규탄된다. 거의 뭐 강동원이 주연으로 출연해 태극기를 휘날리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어야 할 것 같은 그림이다. 하늘에서는 은하영웅전설에 나오는 민주주의의 마법사 양 웬리가 모는 우주전함에 타고 있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민주영웅들이 자상하게 미소지으며 내려다보는 그런 서사일 것이다.


제발 아자토스가 우주에서 날아와 다 무(無)로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무! 우리는 실은 그것을 얼마나 바란단 말인가.


이야기에 이야기만을 더해가 복잡하게 꼬인 서사는, 또 그 결과로 대단히 유치해진 서사는 풀어내야 할 것이 아니다.


통째로 버려야 하는 것이다.


게슈탈트 심리치료의 창시자 프릿츠 펄스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없으면 내 존재가 통째로 없어지지 않을까?


우리는 분명 그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가 완전히 없는 순수체험을 해본 이는 알고 있다.


이야기가 없으면 나는 그 어느 순간보다 가장 분명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은 순수체험인지 거시기인지 하는 뭔가 수상한 것을 먼저 해볼 수 있었던 소수의 이들에게만 가능한 현실이 아니냐고 (즉, 그것은 또 다른 더러운 반민주적 부르주아 엘리트주의가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야기를 통째로 버리면 그 순간 누구에게나 순수체험은 일어난다고.


순수체험의 결과로 이야기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없애면 순수체험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선(禪)이다.


또 이렇게도 말해보자.


뭔가 더 특별한 것이 생기면 디즈니랜드를 벗어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 똑같은 미키마우스의 얼굴을 한 디즈니랜드에서 벗어나는 일 자체가 특별한 것이라고.


단순한 그림으로만 상상해봐도, 그게 나다.


애초에 서사정체성 같은 것을 만들려고 한 이유도, 무엇인가 남들과 다른 특별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남들과 완전히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그럴듯한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이 말처럼 쉽지 않으리란 것을 잘 이해한다.


마치 벼랑에서 뛰라는 일처럼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날개를 가진 새를 날게 만드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정말로 이해한다.


나 역시 정확하게 그러했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내내 융에 빠져 살았고, 신화를 사랑해서 인도신화나 메소포타미아신화 속 신들의 이름이나 외우고 다녔고, 그렇게 보다 특별한 이야기를 소비할수록 또 내 것으로 소유할수록 내 자신이 특별해진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땐 왜 그랬지, 하며 진심으로 쪽팔려한다.


내가 과거에 했던 모든 것은 틀렸다.


나는 과거에도 무엇인가 진정한 것을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런 진정한 것은 없었다는 것을 늘 지금 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제목처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나는 언제나 지금만을 살고 있으며, 지금에만 나는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해서 나를 세우고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이라는 이 존재의 시간이다.


그러니 나는 그 모든 어려움을 감안하여 이렇게만 말하고 싶다.


이 일이 경제적이고 힘이 덜 든다.


심리학은 인간의 고통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디즈니랜드는 티켓값도 비싸서 애초 힘이 많이 든다는 것을 떠올려달라. 더 큰 힘을 동원해 더 작은 고통을 감소시킨다면 그것은 경제적이지 않다. 우주비행사가 분유를 타고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힘의 낭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필요한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새로운 현실, 바로 나로 사는 현실은 어디에서 더욱 경제적으로 얻을 수 있는가?


늘 상대와 충돌할까 긴장하고 상대가 자신의 서사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는 디즈니랜드 심리학인가, 아니면 동네 고양이들과 가끔 인사하는 이 정다운 거리의 선(禪)인가.


나는 제안해본다.


당신이 이 물음에 답하지 말고, 당신 안에 있는 그 눈물이 대답하게 해보자.


그러면 그게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본래의 심리학이다.


내가 뛰었던 것은, 나 역시 정확하게 그 눈물의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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