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종소리"
우리는 의심해봐야 한다.
자기 생각을.
고집스럽게 작동하는 자기 생각이란 거의 반드시 자기 안에 있는 남의 생각이다.
의심은 내 안에 있는 남의 생각으로 내 밖에 있는 남의 생각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둘을 동시에 의심하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진 당연한 정답이라도 되는 듯이 어떤 집단의 편에 서야 하고, 어떤 사회적 명사를 지지해야 하고, 어떤 도덕적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등에 대한 그 모든 내외적인 남의 생각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삶이 답답하고 막혀 있는 것으로 경험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키고 있는 그 남의 생각이 더는 정답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그게 정답처럼 작동했을 때도 있다. 그러니 그걸 지키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을 오를 때는 뗏목이 필요하지 않다. 또 새가 나는 일에 필요한 것은 더는 자기를 보호해줄 알껍질이 아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니 말만 정답이 아니라 너도 나도 다 동등한 가치의 상대적 정답을 갖고 있다는 그 뜻이 결코 아니다.
그런 초등학교 말싸움 대회를 위한 뜻이 아니다.
환경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그때그때의 필요가 늘 다르게 변해간다는 뜻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면의 종소리, 바로 그것이 울린다.
수업 때가 되면 울리고, 식사 때가 되면 울리고, 하교 때가 되면 울리듯이, 내면의 종소리가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리기 위해 울린다.
의심한다는 것은 정답 같은 권위를 갖고 있는 남의 생각들, 특히 내 생각으로 착각되는 내 안의 남의 생각을 다 옆으로 치운 뒤, 오직 내면의 종소리만을 들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건 반드시 울린다.
우리의 삶이 막혀 있을 때면 언제나 반드시 울리고 있다.
자기 생각에 빠져, 남의 생각에 빠져, 그렇게 내외부를 가득 메운 남의 생각에 전적으로 몰두하느라 자기의 종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또 남의 생각을 주입받기 위한 함정의 구조도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양자택일의 프레임이다.
너 빨간색이야, 파란색이야?
너 성숙한 민주시민 할 거야, MZ세대 할 거야?
너 아빠랑 살 거야, 엄마랑 살 거야?
이렇게 무엇을 선택하든 반드시 남의 생각의 프레임 위에서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그러니 결국은 남의 생각 위에서만 놀게 되는 이 구조가 우리에게 강제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의 선택을 가장 현명하게 이룬다는 하나의 방식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빨간색과 파란색이 각기 다 온전하고 괜찮다는 것을 알아주면 된다는 도덕적 방법론이다.
그러면 마치 강요된 선택의 문제가 없어지고, 자신이 제일 현명한 선택을 한 것 같은 착각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아무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선택장애의 교묘한 회피책일 뿐이다. 언어로 모두를 만족시킬 가상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그 언어의 세계로 도주하려는 발상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바로 가장 큰 남의 생각이다.
이 회피책에 도달한 이는 자기가 지혜로운 해결책을 스스로 생각해냈다고 경험하지만, 실은 이것이 가장 커다란 남의 생각에 세뇌된 모습이다.
이게 바로 조선의 유학자들이 늘 당파싸움을 반복하면서 꿈꾸었던 통합의 해결책이다.
모든 것의 선함과 장점을 알아주는 자기의 도덕적 우위로 모든 것을 다 자기 아래 통합하겠다는 발상이다. "당신 말도 맞구려."라는 황희의 삽화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이처럼 한 사회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배하고 있으면서 그 자신은 결코 도전되지 않는 도덕적 관념이 바로 가장 커다란 남의 생각이다.
그러나 도덕은 내면의 종이 아니다. 오히려 내면의 세콤이다.
도덕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면 혼나고 추방되는지만을 경고한다.
실은 혼나고 추방되지 않으려고만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면서, 자기가 그 일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 도덕에 세뇌된 이의 특징이다. 이를테면, 자기는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이를 지키는 가면히어로의 모습 같은 것을 격하게 예찬한다. 그러니 그러한 일을 정답이라고 고집해야 하는 상황도 생겨난다. 인간이면 당연히 지켜야 할 정답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아무 삶의 보람이 없어서 지속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세콤의 경고알림에 따라 늘 힘들어지기만 하는 삶의 선택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그러면 종소리는 어떻게 알리는가?
너 빨간색이야 파란색이야, 라는 선택을 종용받을 때 종소리는 이렇게 울린다.
뜰 앞의 측백나무.
이것이 선(禪)의 화법이다.
진짜 선택이다.
남의 생각의 프레임 자체를 벗어나는 방식이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것은, 또 나에게 필요한 것은 뜰 앞의 측백나무이지,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니다.
빨간색을 고르면 세상이 불지옥이 될 것이라는 것과, 파란색을 고르면 세상이 다 물에 잠길 것이라는 것은 다 남의 두려움이다.
자기가 두렵다고 다른 이들을 조종해서 자기 생각대로 되게 하려는 것이 세뇌다.
가장 큰 남의 생각인 도덕은 가장 두려워하는 이에게서 생겨나며, 결국 가장 큰 세뇌가 된다.
남의 생각으로 산다는 것은 이처럼 남의 두려움을 대신 처리해주기만 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처리비용을 받지도 못한다.
오히려 자기 두려움을 넘기고 있는 이들은 우리 위에 서서 자기들이 우리를 위해 무척이나 힘쓰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며 스승노릇을 하려고 한다. 이 시대의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 연예인들, 선동가들, 쇼연출가들, 미디어유명인들이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스승처럼 굴고 있는지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우리에게 자기들의 쓰레기는 떠넘기면서, 좋은 자원은 뜯어내기까지 하고 있는 셈이다.
남의 생각을 의심하지 않고 정답으로 따라 살면 결국 우리는 뺏기기만 하는 신세가 된다. 이런 처지를 노예라고 말한다. 최후의 실존주의자인 베르쟈예프는 현대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얼마나 교묘하게 노예가 될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아주 섬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노예로 만들고자 하는 이런 남의 생각들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우리 내면의 종소리, 오직 그것뿐이다.
내면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내가 고요하게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유튜브를 끄고 그 시간에 귀를 기울여보면 나에게 필요한 모든 답은 거기 다 있다.
익숙하지 않을 뿐 우리는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이미 안다.
우리는 사실 다 알고 있는 존재다.
내면의 종소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정말로 사실이라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잘은 모르겠지만, 이 사람 뭔가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분명 제대로 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그 정도라 해도 충분하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들은 것이다.
자기 내면의 종소리를.
그렇게 한 번 들린 종소리는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점점 더 크게 울릴 것이며, 당신 주변의 쓸데없는 남의 생각들을 고요하게 만들 것이다.
남의 생각들이 만들어낸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다.
남는 것은 이제 단 하나다.
가서 당신 자신의 삶을 살라.
빨간색도 파란색도 아니고, 또 뜰 앞의 측백나무도 아닌, 그것은 그냥 당신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당신은 그것을 그냥 '나'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또 처음으로 그렇게 말해보는 순간에, 당신은 왠지 울음이 북받치지 않겠는가.
내면의 종소리는 나를 울리는 소리.
그렇게 내가 있음을 알리는 소리다.
나를 만난 것이다.
긴 방황 끝에 이제야 나인 것이다.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사랑하는 것들이 마침내 만나 결합하게 된 이 순간을 영원으로 전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