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여성성"
양육과잉과 마마보이들의 시대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두말없이 '여성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여성성이라는 개념을 어떤 섹슈얼리티의 담론을 위해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 꼭 밝혀두고 싶다. 여성성을 서사정체성의 문법으로 다루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여성성의 개념은 심리종교적인 의미만을 갖는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여성성의 회복이 필요하다.
특히 엄마에게는 제일 필요하다. 오늘날의 엄마들은 가장 여성성을 잃은 이들이다.
여성성이 망각되거나 상실되었을 때 핵심적으로 부각되는 문제는 지배욕이다. 이것은 과잉된 통제의 의지로 행사된다. 가장 치사한 형태의 통제방식은 죄책감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자신이 불쌍한 피해자인 척하며 죄책감을 야기해 타인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모습은 이 시대에 아주 만연해있다.
쉽게 말해, 엄마가 안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앓는 소리를 내면 가족들은 모두 죄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결국 가족여행의 행선지는 엄마가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결정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교묘한 지배 속에서 양육되어온 마마보이 및 마마걸들은 그들 또한 이 치사한 방식을 발달시킨다. 많이 맞아본 이가 어느 부위를 때려야 아픈지를 잘 알게 되는 그 원리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엄마와 자식들은 서로에 대한 지배욕을 행사하기 위한 암투를 펼치게 된다. 자식을 지배하려는 엄마에 대해 자식은 역으로 엄마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식은 영영 엄마를 떠날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지배력의 문제에 있어 자식이 엄마보다 한참이나 하수라는 그 방증이 된다. 자식이 엄마를 지배하려고 늘 엄마 옆에서 빙빙 도는 이 상황이 생겨난 자체가 바로 자식을 자기에게서 떠나지 못하게끔 의도한 엄마의 지배력의 승리인 것이다.
보통 이와 같이 엄마와 자식간에 유착된 상황이 생겨난 가정에서는 아빠가 여성성의 담지자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 황무지에 가까스로 피어난 꽃은 신속히 제초되기 마련이다. 엄마와 자식은 연합하여 여성성을 드러내는 아빠를 한심한 무능력자로 규탄한다. 자식의 적의는 노골적이며, 엄마는 양쪽을 중재하는 척하면서 자식의 행위에 대리만족한다.
지금 엄마와 자식은 훌륭한 가부장의 수호신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여성성이라는 것을 뿌리뽑으려 한다.
나는 지금 우리에게서 왜 여성성이 실종되었는가의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가부장은 여성성의 말살을 꿈꾼다. 여성성을 가장 잃어 지배욕의 화신이 된 엄마가 실은 가부장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사실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나는 가부장제의 문제를 남성성이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여성성을 잃은 것들이 여성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본다.
여성성을 잃으면 왜 지배적으로 변하는가?
여성성의 핵심이 무엇에도 지배되지 않는 그 속성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를 암시해준다. 아담의 첫 번째 아내였던 릴리스는 애초 아담의 종속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갈빗대를 빌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담과 똑같이 흙에서 창조되었다.
그래서 아담은 매일같이 그의 신 야훼에게 호소했다. 에덴동산의 다른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말을 따르는데 릴리스만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심지어 릴리스는 아담과 헤어질 때도 추방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아담의 곁을 떠났다. 어쩌면 이것이 인류 최초의 자유의지였을지 모른다.
가부장적 관점으로 해석된 신화에서는 이처럼 여성이 남성을 따라야 하는 본질을 잃으면 그 결과로 타락해 사탄의 신부가 되는 것으로 보지만, 중요한 진실은 마녀재판관들만큼 마녀들의 매력을 잘 알고 있던 이들도 없다는 점이다. 릴리스를 규탄하고자 하는 이들은 그녀가 얼마나 성적으로 잘 발달했고 유혹적인지를 도색잡지처럼 집요하게 묘사하고자 했다. 또 그러한 매력을 가진 여성들이 마녀로 판정받아 화형대 위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자신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즉 지배할 수 없는 아주 매력적인 것을 향한 일그러진 지배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지배되지 않는 자란 그렇다면 어떤 자인가?
지배하려 하지 않는 자다.
그는 지배하려 하지 않기에 지배되지도 않는다.
나는 무엇도 지배하려 하지 않는 이 속성이 여성성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성성을 잃으면 지배욕이 폭주하는 것도 당연하다.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면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자리에 놓아두는 것이고, 곧 수용하는 것이다.
수용은 자신이 품는 행위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있는 그대로가 품는 것이다.
왜 여성성이 고전적으로는 바다, 대지, 밤 등의 상징으로 묘사되었는지의 이유다. 대지는 우리를 품지 않는다. 그저 대지로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도 그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생명이 키워진다.
이것은 임의로 안전한 울타리를 제공하고, 그 울타리 안에서 관심을 주며 울타리만 벗어나지 않도록 방목하면, 양떼들이 알아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규칙을 잘 지키는 착한 양떼로 자라게 된다는 따위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엄마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가장 지배적인 현실이다.
가장 지배적인 현실이란 그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지배되고자 하는 현실이다. 아무도 우리를 지배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가 알아서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고 지켜가자는 흡사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 것 같은 이 그림에는 반드시 최면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자율성이 좋은 것이고, 우수한 것이며, 올바른 것이라는 가치의 최면이다.
최면은 직접적으로 대상을 앉혀놓고 어떠한 사상 및 이념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훨씬 교묘하게 이루어진다. 최면을 시도하는 지배자들은 단지 프레임만 짤 뿐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에 개인들이 욕망하는 이상적 가치를 미끼로 설치한다. 그러면 알아서 다들 덫에 걸려 포획된다.
가부장이라는 최면의 지배구조에 계속 최면되어온 엄마도 이런 덫을 쓰는 일에 아주 능숙하다.
자기가 그러했듯이, 아이들도 자기처럼 '자발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되기를 획책한다. 가장 지배하고 있으면서, 자신은 민주적 자율성을 중요시하는 최고의 수용자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여성성은 민주적 자율성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오히려 근대에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이들은 중세에는 마녀재판을 하던 이들이다. 하나는 합리적이고 다른 하나는 비합리적이라는 식으로 그 둘이 다른 것이 아니다. 둘은 똑같다. 올바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가치의 최면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정말 재미있는 얘기지만, 최면을 하는 꽤 많은 이들은 자신이 매력적인 여성을 지배할 수 있기를 꿈꾸며 최면을 배우고 또 가르치곤 한다. 다큐멘터리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자기를 늘 선한 모습으로 연출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올바른 사람으로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도 이들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자기를 가르치던 자기 엄마의 모습과 분명 같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이 매력적인 여성을 지배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는다. 자기가 매력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정말로 매력적인 여성은 최면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지배될 수 없다. 마치 지배의 손아귀에 놓인 것 같다가도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툭 튀어나가버린다. 프레임 자체를 쉽게 깨버린다. 릴리스가 그러했다.
바다의 속성이 진실로 이렇지 않던가.
고요하게 순응하는 듯하지만 언제라도 다 뒤집을 수 있다.
이런 바다를 우리는 경외한다.
우리에게 여성성이 회복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러한 경외감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떠올려보면 이는 분명하다
우리의 엄마들이 아직은 릴리스의 면모를 완전히 잃지 않았던 어떤 시절, 엄마들은 단지 친밀한 존재만은 아니었다. 친밀감과 함께 어떠한 경외감이 거기에는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흡사 엄마를 여신처럼 경험하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좋은 엄마가 되려면 여성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고도 말하며, 마치 여성성과 모성이 모순되는 대극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여성성은 가장 좋은 엄마의 조건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가르치는 대로 배우지 않고, 엄마가 하는 대로 배우기 때문이다.
무엇도 지배하려 하지 않는 그 삶의 모습은, 그래서 피어나는 여유와, 능청과, 재치의 성숙하고도 부드러운 향기는 아이들에게 배일수록 더욱 좋은 것이다.
엄마가 여성성을 잃게 됨에 따라 대신 아이들에게 배이게 된 것은 불안과, 심각과, 경직의 미숙하고도 거친 태도다. 이것은 삶에 대한 불신으로 말미암아 삶을 지배하고자 하는 태도다. 바로 이 태도를 세습받아 아이는 마마보이, 마마걸이 된다. 그렇게 아이도 여성성을 잃는다.
내가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여성성을 잃으면 남성성도 함께 잃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성이 결여되면 대신 남성성이 과잉되거나 하는 식으로, 여성성과 남성성도 모순을 이루는 대극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성과 남성성은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같은 것일 수 있다.
차라리 여성성과 남성성을 자유에 대한 두 방향성이라고 이해해보자.
여성성은 결코 지배될 수 없는 자유의 양상이다. 이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자유의 속성을 대변한다. 자유의 발산이다.
남성성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 자유의 양상이다. 이것은 자신의 자유를 어떤 소중한 하나에 묶는 자유의 속성을 대변한다. 자유의 수렴이다.
그래서 남성성을 잃은 이들은 배신의 주제를 거듭 경험한다. 남성성의 상실은 동시에 여성성의 상실을 의미하니, 이러한 경우에는 지배하거나 지배되는 속에서 배신하거나 배신되는 일만을 되풀이한다.
느와르 영화는 정확하게 이 지배와 배신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성을 잃은 마마보이들이 남성성을 갈망하며 서로에게 충직한 모습을 힘써 추구하려 하나 결국에는 그 일이 서로에 대한 지배력을 강제하려는 일이 되어 끝내 배신을 경험하게 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단지 영화 속에서만의 얘기가 아니다.
지배와 배신은 오늘날을 대표하는 심리적 주제다.
부모와 자식, 연인, 가족, 친구, 사회적 동료 등, 그 모든 관계의 역할 사이에서 언제든 돌출될 준비를 하고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가 반드시 그 이야기로 사는 개인에게 경험하게 만드는 주제다.
이야기 자체가 애초 삶을 언어로 소유해서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미 그 시작부터가 삶에의 배신이다. 그러니 이야기로 살면 살수록 삶과는 괴리되며,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삶이 자신을 배신한 것처럼 거꾸로 착각하게 되는 일이 생겨난다.
그러나 엄연히 이 지배와 배신의 주제는 이야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지배와 배신의 주제를 다시 한 단어로 묶는 일도 가능하다.
우리는 이제 '우상'이라는 표현을 만날 차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우상이 되려 하는 서사를 꿈꿀 때, 또 우리가 누군가를 우상으로 삼으려 하는 서사를 꿈꿀 때, 거기에는 반드시 지배와 배신의 문제가 출현한다.
틸리히는 이 우상의 문제를, 유한한 것이 똑같은 유한한 것에게 무한한 것을 기대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정의했다.
나는 이 정의를 살짝 변주해서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우상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 똑같이 자유롭지 못한 것에게 자유를 기대해서 생기는 문제다.
우상은 사실 가장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자유를 발산하지도 또 수렴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자유의 정체 상태에 대해 자신은 지금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며 부단한 합리화가 이루어진다. 마마보이와 양육과잉의 엄마들이 드러내는 상태다. 그들은 서로에게 우상이 되어 있으며, 또 외부의 대상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우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늘날 범람하는 연예인병의 정체다.
자기를 대단하고 특별한 존재처럼 우상화하기 위해 서사는 도구로 동원되며, 서사정체성은 정확하게 그 우상의 형상이다.
여성성이라는 개념도 자주 이 서사의 문제로 간주된다. 어떤 고유한 서사정체성을 확립함으로써만 여성성이라는 것이 획득된다고 믿어지곤 한다.
그것은 마치 자유의 이야기를 써가면 자신이 자유롭게 된다고 믿는 일과도 같다.
그러나 자유의 이야기를 쓰는 일에 그렇게 붙들려있는 이가 자유로울 수는 없다.
심리종교적 관점에서 여성성이라는 것이 돌연히 어디로든 튀어나갈 수 있는 예측불가능의 속성이라는 것을 다시 환기해보자.
그렇기에 자기를 가장 부자유하게 우상화하려는 서사에 미쳐있는 이 시대에 여성성은 더욱 긴히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지배하고 결국에는 배신하게 될 이야기들에서, 그 모든 우상에서 우리가 벗어날 동력은 여성성에 있다.
서사정체성은 이야기로 자신을 소유하려 하는 것이다. 내가 갈빗대를 뽑아 만든 펜으로 내 자신을 창조했다며, 나를 나의 소유물처럼 상정하는 일이다.
나는 릴리스.
그렇지 않고 나는 스스로 있는 그대로인 자라며, '나'라고 이름붙인 그 유치한 포장지를 섹시하게 벗는다.
그래서 나다.
나는 울타리 안을 자상하게 지켜보며 양육하는 목자가 아니다.
나는 숲의 마녀다. 숲의 눈이다. 내가 숲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숲이다. 숲의 권세다. 디오니소스이고, 벗어던진 자유다. 어떤 것도 지배하지 않을 참말을 한다. 참말을 생명의 호흡으로 나누며 아이들과 숲에서 논다.
아이들이 숲으로 간 것은 마녀가 욕망의 눈깔사탕으로 유혹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의 정직한 눈에는 정확하게 마녀가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생명으로 키우는 것은 생명에게 너무나 매력적이다.
생명이 느끼는 이 매력을 바로 신비라고 말한다.
유한한 것이 어떤 무한한 것의 향기를 맡게 되었을 때 경험하는 그것이다.
그 향기를 따라 무한의 숲으로 갈 때, 이제 우리의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은 것은 신비로운 영혼의 피톤치드. 서사의 우상에 대한 항균작용을 한다.
그것은 마녀의 축복.
있는 그대로 늘 그렇게 자유롭기를.
대견한 것들에게 참 대견하다고 전하는.
그 깊은 경외의 애정을 담아, 자라나는 생명의 머리를 쓰다듬는 마녀의 손길처럼, 여성성은 우리 마음의 숲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