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아무 관계없는 것들"
명상이니, 수행이니, 철학이니, 심리학이니, 인문학이니, 다 깨달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예술이니, 문학이니, 또 영화나 음악, 만화 등도 깨달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맛있는 밥을 찾아 먹는 일, 옷을 예쁘게 입는 일, 좋은 집에 사는 일, 그리고 많은 돈을 버는 일, 정말로 다 깨달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들이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더 바람직한 민주시민이 되고,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윤리적 주체가 되는 일 등은, 진심으로 다 깨달음과 아무 관계가 없는 일들이다.
그 어떤 사회문화적 소재를 풍요롭게 소비한다 해도, 깨달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가상의 언어와 이야기로 만든 그 모든 세상살이의 질적 수준을 높인다고 해도, 깨달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더 분명하게, 우리가 세간을 살아가는 그 모든 일은, 깨달음과는 절대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
수피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유명한 시는 이러한 의미를 아주 잘 함축하고 있다.
"여기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대가 온다면, 또한 이것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비유도 가능하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그냥 신부대기실에서 이것저것 해보는 것뿐이다. 신부 자신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신랑을 더 빨리 오게 하거나 더 늦게 오게 하는 데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토록 기다리던 신랑이 오면 신부는 그저 하던 모든 일을 다 그만두고 신랑의 뒤를 따를 뿐이다.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었다.
잘 놀았다, 단지 그 말로 충분한 것들이다.
깨달음은 언제나 죽음의 감수성을 담지한다.
죽음을 어떻게든 회피하거나 무시하고자 하는 이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 이들은 매트릭스의 네오 같은 마법사를 꿈꾼다. 대개 자신의 생존에 대한 극도의 긴장이 만들어낸 뇌의 화학물질의 분비로 인해 이상한 메타인지적 신비체험 같은 것을 한 뒤 자기가 깨달은 줄 아는 이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이들은 자기가 세상의 구조를 파악했다고 생각한다. 모든 구조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으며, 언어적 이야기로 작동한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자기는 그러한 사상의 본질을 파악했기 때문에 마치 천재해커처럼 세상의 규칙을 자기를 위해 임의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고 믿게 된다.
이것이 자기우상화의 상태다.
왜 이런 상태가 만들어지냐면,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워서 일종의 해리된 상태를 만들어낸 뒤,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상으로 보게 된 것이다.
물론 가상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 사회적 문명세계는 가상이 맞다. 언어적 규칙으로 조형된 허구의 발명품이다.
문명은 죽음에 대처하기 위한 인간의 안간힘을 담은 거대한 조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세상의 비밀을 안다고 간주하는 전능한 마법사 아동들의 놀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더욱 애절한 것이다.
정말로 세상이 가상이라는 것을 목격한 이는, "아하, 이제 내가 세상 앞에 쫄 필요 없이 당당하게 내 자신을 외치면 되겠구나."라고 행위하는 대신에 다만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던 그 인간의 심정을 묵상한다.
그러면서 이해하게 된다.
죽음이 두려워진 이유는, 오히려 죽음에 대처하기 위한 이 가상물을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죽음이 두려워 우상을 세운 뒤 숭배하고 있었지만, 실은 자신이 세운 그 우상으로 인해 두려워진 것이다.
누군가 자기를 두렵게 할 우상을 세워 자신을 협박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이제 쫄 필요 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당당해질 것이라는 말은 적용될 수 없다. 자기를 두렵게 하던 그런 '적'은 애초부터 없었다. 다 자기가 세운 우상이다.
자기가 억압하고, 자기가 해방자인 척 하는 삼류연극일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신비체험 같은 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한, 이 삼류연극은 지속된다.
삼류연극을 지속하는 이유는 연극에 빠져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죽음을.
거기에는 오직 그 이득만이 있다.
연극에 몰입하기 위해 사람들은, 특히 깨달은 척하는 이들은 자기가 어떤 진정한 것을 이제 알게 되었고, 또 그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회문화적 소재를 사용하든 거기에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다. 영화로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이야기를 통해 내 마음을 깨닫기, 내 안의 내면아이들을 깨달아주는 참나를 깨닫기, 대충 이런 식이다.
이들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남용하는 이유는, 그렇게 뭔가 진정한 것을 알게 된 사람처럼 행세하고 있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희박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는 까닭이다. 어이쿠, 여기 깨달은 분이 계시네, 라며 죽음이 자기를 비켜가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 생존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일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생존의 문제를 극복해줄 어떠한 만능열쇠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에 생겨난 일이다. 쉽게 말해, 깨달으면 생존을 완전보장받을 수 있는 어떤 마법적 능력을 얻게 되거나 환상적 상태가 되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운좋게 주변에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한번 물어볼 수 있다.
깨달으면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
그렇게들 대답할 것이다.
깨달음이 원래 죽음의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깨달으면 죽음을 극복할 어떤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은 죽음과 더 친해지는 길이다.
물론 깨달음은 죽음을 초월하는 힘인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초월'이라는 표현을 마치 무협지의 주인공이 보이는 어떤 상태처럼 자주 오해하기에 생겨나는 착각이 크다. 초월은 그 초월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친해져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생존을 위한 모든 활동은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한 안간힘이다. 그래서 생존지상주의는 우리가 깨닫는 일을 가장 가로막는 기제다. 이것 또한 깨달은 이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은 분명하다.
깨달음과 생존지상주의는 정반대편에 있다.
예수는 정확하게 하늘의 것과 카이사르의 것을 구분하라고 말했다. 그것이 이 의미다.
그러나 이것은 깨달음을 위해 생존을 포기하라는 따위의 말이 아니다.
그 둘 사이에 절대적인 경계를 분명히 하라는 말이다.
실은 죽음이 두려워 생존을 증진하기 위해 그 모든 일을 하고 있으면서, 거기에 깨달음이라는 말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의 서사정체성을 그럴듯하게 소설로 써서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려는 일이 마치 깨달음의 일을 하는 것처럼, 또는 하루하루 깨달음에 가깝게 다가가는 어떤 일을 하는 것처럼 기만하며 사기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는 사실 진리의 구조를 다 알고 있기에, 생존을 위해 사람들에게 그냥 그렇게 허구의 판타지를 보급해도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소위, 자기는 깨달아서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기에, 무슨 일을 해도 괜찮으며 자기의 깨달음은 유지된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그저 여전히 자기가 생존에 쫄아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밖에는 놓여 있지 않다.
깨달음 같은 것은 이미 있지도 않다.
고작해야 자기가 신체생리학적으로 발생한 모종의 신비체험 경험자라는 그 하찮은 기억쪼가리만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이들은 표현 그대로 깨달음이라는 것을 하찮게 만들고 있는 이들이다.
깨달음의 경계를 분명히 세우기보다는, 경계를 무시하여 생존의 프레임에 깨달음을 도구로 부속시키고 있는 이들이다.
더 쉽게 말해, 생존의 현실이 깨달음보다 큰 것이라고 실은 동의하고 있는 이들이다.
앞선 비유를 통해 다시 묘사하자면, 어떠한 신부가 신랑보다 그 대기실에서 자기가 갖고 놀고 있는 인형들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장면과도 같다.
신부대기실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 신부에게는 흡사 죽음과도 같다.
정직하게는, 자기는 누군지도 모를 신랑의 신부 같은 것은 되기 싫다고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러면 된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같은 것이 그리 싫으면서, 왜 어여쁜 신부인 척하고 있는가?
깨달은 척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일이다.
오히려 반대로 자기와 깨달음이 아무 관계가 없으며, 심지어 자기는 깨달음이 싫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것은 깨달음의 경계를 아주 분명하게 세우는 일인 까닭이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이는 깨달음의 현실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가출한 현실을 떠올려보자.
붓다는 촛불을 켜놓은 테이블 위에서 매일 스테이크를 썰고, 오마카세를 먹으며, 5성 호텔에서 호캉스를 즐기고, 삼성에서 심리학 강연을 하기 위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그의 왕궁에서 가출을 했다.
붓다에게는 어떻게 하면 생존의 현실을 더 풍요롭게 만들 것인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붓다의 가슴 속에는 단 하나, 죽음을 초월하겠다는 그 마음만이 가득했고, 또 생생했다.
그리고 그는 죽음과 친해지는 법을 끝내야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죽을 자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 순간 인간이 되었다.
자기 자리없이 떠돌던 가상의 추상체에서, 지금 여기에 가장 견고하게 존재하는 인간의 자리를 찾았다.
붓다는 인간의 운명에 합류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곧, 나는 죽을 것이다."
깨달음은 신적인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도 왕처럼 누려야 한다는, 근대시민사회가 주장한 그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 그런 것을 아득히 넘어선다.
풍요로운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절대적인 실존의 조건이다.
풍요의 소재로 가득히 치장해야만 자기를 인간으로 실감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실은 얼마나 그 존재가 빈곤한 이란 말인가.
붓다가 얻고 싶었던 것은 어느 조건 속에서도 고귀한 인간의 자태였다.
결코 상실될 수 없는 순수한 그 인간 본래의 빛이었다.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라도 그 빛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뒤 우리에게 그 힌트를 전한 것이다.
그게 바로 죽음이다.
죽음과 친해지는 일이다.
깨달음이 실은 죽음과 친해지는 일이라는 이 말을 싫어하는 이는 많을 수 있다. 그렇게 깨달음은 더 많은 이가 싫어할수록 실은 좋은 것이다. 경계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 좋지도 않고 불쾌하기만 한 깨달음 같은 것은 다 잊는 것이 낫다.
하루하루 생존의 현실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좋다.
그러면 경계는 더욱 분명해져서, 깨달음은 그 모습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게 된다.
역설적으로 깨달음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게 된다.
언제나 가장 나쁜 것은 통합이라는 거지같은 언어로 경계를 흐리는 일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그 둘을 지혜롭게 동시에 운용하는 길이 있다는 망상이다. 실존주의의 아버지인 키르케고르는 자기가 좋은 것만 다 선별적으로 취합할 수 있다는 이 근대적 주체의 망상을 깨부수며, 이것인지 저것인지 결단하라고 말한다.
결단만 하면, 이것만을 열심히 해도 저것이 되고, 저것만을 열심히 해도 이것이 된다.
이것과 저것은 언어가 만들어낸 착시인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삶이다.
자신의 삶이 현실로 펼쳐내는 그 결과를 보면, 자신이 바라고 있는 그 길은 분명하다. 그러면 정직하게 그 길에 전념하면 된다. 그리고 그 길을 깨달음이라고만 말하지 않으면 된다. 말해야 한다면, 깨달음과 아무 관계없다고만 말하면 된다.
깨달음의 길이라는 것은 애초 있지도 않았으며, 원래부터 우리에겐 '이것'뿐이었다.
이 자리에 신랑이 없는데, 결혼식도 이 자리에는 애초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이것'을 하며 기다릴 뿐이다.
'이것'에만 집중할수록 자신이 신부대기실의 신부라는 사실은 더욱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냥 하는 것이지,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죽으면 다 부질없는 것들이다. 역으로 이것들을 하고 있다고 우리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에 근본적으로 어떤 영향이 없다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이런 글이라고 다르겠는가.
이런 글을 쓴다고 내 자신이 더욱 깨달아가겠는가, 혹은 다른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울 수 있는 뭐라도 되겠는가.
그냥 하는 거다.
이 모든 것이 깨달음과 아무 관계없다는 그 사실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러한 모든 사람이며, 나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당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소망이 곧 죽어갈 모든 사람의 소망이며,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소망이다.
꽃과 술과 촛불에 몰두했던 것도 다 당신이 그리워서만 했던 그 모든 일.
그렇게 그 모든 것이 다 당신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확인하기 위해 했던 그 모든 일.
생존의 현실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며 우리는 생존의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열심히 "Neti, Neti(아니고, 아니다)."라고 하고 있던 것과도 같다.
모든 것이 점차 무의미해지는 가운데, 그리움의 침묵만이 커져갈지 모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에 좋은 상태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 소리가 들릴 것이지만, 조금 이르게 그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붓다가 한 일이 그와 같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붓다는 그 죽음을 미리 자기 앞으로 당겨오고자 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두드리고 있었다.
우리는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니다. 계속 거기에 있으며 이제는 준비가 되었냐는 신랑의 소리를 듣고 있던 것이다.
행복해서 죽을 준비가 되었냐고.
그것은 처음부터 늘 그곳에 있었다.
정말로 그것이 있었다.
무수한 경전의 말씀들처럼, 정말로 그것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죽어도 좋다.
실은 내가 살아온 그 유일한 이유를 이제 만났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아무 것과도 관계없고, 오직 영원한 당신과만 관계된 것이다.
내가 죽고 당신이 그 자리에 와서, 이제 당신을 나라고 부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그동안 놀던 모든 것을 놓고 신부대기실을 나가 살 때의 얘기다. 우리가 하나인 삶은 저 문 밖에서 펼쳐진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주섬주섬 꽃과 술과 촛불을 양팔에 가득 챙기던 우리가 뒤를 돌아보면 문은 어느새 닫혀 있고, 그것은 우리가 신랑을 품에 안을 양팔을 스스로 잃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문 뒤에 남은 이들은 이제 신부수업의 선생이 되어 좋은 신부가 되는 법을 가르치며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은 채 늙어간다.
자기는 신랑의 모습을 한 번 본 적이 있다면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신부로서의 자기의 권위를 내세우며 스승놀이를 하다가, 또 신부들에게 패물을 받아 챙기다가 문가에 쓰러져 죽게 될 것이다.
어떤 신부들은 일찌감치 문 밖으로 나가고, 또 어떤 신부들은 아무 생각없이 즐겁게 화환을 만들고 있는 동안,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러한 신부는 자기가 신랑을 봤다는 환상 속에서 신랑없는 자신의 노후를 위한 생계비를 벌기 위해 문가에서 신랑얘기나 팔고 있는 보따리장수가 될 것이다.
그렇게 실은 가장 신랑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가 다 해야 한다는 강퍅한 방식만을 계발하며 또 전도하게 될 것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자기가 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달과 손가락도 사실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달빛이 스스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하던 것을 다 놓고 달빛만을 꽉 붙잡는 이는 달빛에 안겨 달로 떠난다.
달의 신부가 된다.
달나라 외계인처럼 하나하나 처음으로 다시 배워가며 지구에서의 삶을 살 것이다.
처음으로 새롭게 인간이 되어, 모든 사람이 될 것이며, 죽을 것이다. 그 삶에 후회가 없을 것이다.
자기 덕분에 인간으로 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고, 신랑과 나누는 그 정다운 담소가 끝이 없을 것이다.
깨달음은 그렇게 나날이 깊어가는 밤과 같다.
밤이 깊어, 달빛도 환하고, 인간의 여행자에게도 그 길이 선명하다.
인간의 여행자는 인간으로 죽기 위해 길을 떠난다.
우리가 지금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지금 이 모습으로는 죽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 충만하고 의미있는 어떤 모습이 되어야만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그 모습, 우리가 죽어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인간이다.
당신을 만나게 된 그 자리다.
당신이 달빛으로 비추고 있고, 당신이 땅으로 받치고 있으며, 당신과 함께 여행하고 있는 이 삶이다.
당신은 그 모든 것과 아무 관계없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으로 나와 관계한다.
이것은 그 무엇과도 관계없는, 당신과 나하고만의 소중한 약속, 그 언약의 오솔길.
나는 죽을 것이다. 곧, 나는 모든 사람이 될 것이다. 인간이 될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당신의 신부가 될 것이라고 나는 약속했다.